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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장마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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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시민 Aug 08. 2024

02

모든 게 서툴렀다. 7년 전의 어린 자신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를 자주 하던 연주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결과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레기만 했던 연애 초는 어느새 빠른 속도로 무뎌지는 관계가 되었다. 현우가 약속을 하나 둘 까먹기 시작한 일이 점차 생기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현우가 직장인이 되고 연주는 아직 대학생이었을 쯤부터 관계가 틀어졌다. 직장인이었던 현우에 비해 연주는 시간을 대체로 현우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고 연락이 어렵거나, 만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올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쌓였다. 헤어지는 일도 빈번하였다. 현우의 제 입맛대로, 편한 대로 연주를 들었다 쥐었다 하면서도 연주는 끝내 현우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현우의 옆을 지켰다. 

가끔씩 자신을 챙기는 듯한 말투와 조금씩 자신을 챙겼던 단순한 행동이 길고 얕은 관계의 지속성을 만들었다. 연주는 자신의 삶을 잊었다. 그리고 잃었다. 

     

잠시 짚 앞의 마트에 다녀왔다. 아직 입맛의 변화는 없었지만 현우의 생각에 빠져 끼니를 챙기지 않으면 더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단출한 저녁식사였다. 어릴 적 연주는 지금의 자신을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누구나 꿈꾸던 결혼 생활이 있었는데, 지금처럼은 아니었을 텐데, 씁쓸한 감정을 삼키며 연주는 답답한 듯 밥을 넘겼다. 밥알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을 다 먹고 정리 후에 잠시 앉아 쉬던 연주였다. 휴대폰 벨소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았지만 전화를 건 상대방은 혜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사이었다. 서로의 비밀을 다 털어놓을 만큼 친했지만, 현우를 만난 이후로 멀어졌다고 느꼈고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다.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 알법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연주야.     

전화를 받은 혜인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예전을 비교해 봐도 분명히 달랐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연주였다.      


-어, 혜인아 오랜만이네.

-응, 너 혹시 시간 돼?           


혜인의 시간 되는 물음에 연주는 망설여졌다.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할지, 괜히 만나서 모든 걸 다 털어놓고 혜인에게 또 다른 원망을 받을까 무서웠다. 연주의 대답이 길어지자 혜인은 말을 이었다.     


-주말에 시간 되면 잠깐 보자. 

-무슨 일이야?

-얼굴 보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 연락 다시 할게.     


혜인의 깊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용건만 말하고 끊은 혜인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연주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몇 달 아니 그것도 몇 년 만일 수 있는 연락이었다. 가끔 안부는 물었어도 전화까지 하면서 자신의 말을 전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연주는 더욱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불안함에 휩싸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후 혜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날이 다가왔다. oo백화점 앞에서 보자던 혜인은 약속시간에 얼추 맞추어 도착하였다. 멀리서 연주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던 혜인은 연주를 붙잡고 한 카페로 이동하였다. 카페 구석진 곳으로 연주의 몸을 이끌던 혜인은 앉자마자 연주의 손을 잡고 이야기하였다.      


-연주야,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얘기부터 하는 거 아니란 거 알아, 근데 도저히 못 넘어가겠다. 현우 씨, 아이 가졌다며. 지금 그 사람 여기저기 다 말하고 다닌다더라, 아무도 너랑 사이 안 좋은지 모르니까 축하받는다고 난리고, 

-... 뭐?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많이 했어. 너 보니까 며칠 된 거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작정한 것처럼 굴길래 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연락한 거야. 

-...

-미안해, 나도 속 좁게 굴었어.     


혜인의 사과에 연주는 참고 있었던 모든 일들을 혜인에게 주저 없이 말하였다. 사과도 덧붙이며, 자신의 7년의 생활을 말하고 나서야 혜인은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연주를 안아주었다.     


-혜인아 나 어떡하지?

-지나간 건 잊자. 아이, 잘 키울 수 있게 나도 도울게.

-고마워, 그동안 말 못 해서 미안해, 내 안에 아픈 것만 생각하느라 남을 볼 이유를 못 찾았어.

-괜찮아. 연주야, 잊자. 우리, 다시 시작하면 돼.     


혜인은 연주의 턱 끝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연주는 혜인에게 고맙다며 다음에 집에 올 수 있으면 오라는 말을 전하고 서로 헤어졌다. 혜인에게는 연애초 에는 여러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았었다. 그 후로도 몇 번 털어놓았지만, 연주는 혜인의 조언이나 충고들을 듣지 않았고 혜인 또한 그런 연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면서도 마음이 쓰였던 혜인은 연주 관련해서 일이 생기자 바로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연주는 몸에 힘이 다 빠진 채로 집에 도착하였다. 며칠새 많은 일이 생겼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고, 현우에게 알렸고 현우는 주변인들에게 떠들었고 혜인이 알게 되어 찾아왔다. 이렇게까지 일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현우에게 알리고 조용히 외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다. 사람들에게 도움 받는 걸 꺼려했던 연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의 최선이었고 최대로 할 수 있는 선택들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연주는 아침 일찍 급하게 나가느라 어질러놓았던 거실과 방을 정리하였다. 속이 후련하면서도 답답하였다. 혜인이가 알게 되었다는 건 앞으로 며칠 동안 같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연락이 올 것이라는 것이 예상되는 행동이었다. 하나둘, 무슨 생각을 하며 연락을 할까. 잘 되었다고 안부를 할까, 그럴 줄 알았다고 욕을 할까. 연주를 알음알음이 있던 사람들이 자신과 현우의 관계를 입에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귀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말들. 이제는 뭐라고 이야기하며 남을 살필지 궁금했다. 임신,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임신, 이게 맞는 걸까? 결혼도 남편도 없이 혼자 꾸려나갈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묻는 질문이 이어지며 연주는 소파에 기대었다. 바뀔 수 있을까? 7년 동안 난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연주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상상을 하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할 수가 없었다.                              





현우의 임신 사실을 알리기 시작하자 현우는 진정으로 아빠가 된 기분이 들었다. 좋은 소식 들었다며 아는 체를 하는 다른 부서의 사람들도 생겼다. 7년 연애하더니 결국 결혼하냐는 소리와 임신까지 축하한다며 모두가 아는 체를 하였다. 일하면서 얻는 칭찬이나 승진으로 인한 성취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결혼도 지금 마음 같아서는 연주를 설득하여 진행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둘도 없는 자식이 생긴다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었다면 좀 더 빨리 아이를 가질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가 결혼 빨리 하라는 이유와 아이를 낳으면 달라질 것이라는 말들이 기억났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생각들이 생겼다. 본능적이라면 본능적이었다. 내 아이, 나의 핏줄, 나의 성을 따르는 자그마한 아이. 연주에게는 조금 더 이 감정을 늦게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불같이 화를 내는데, 이런 생각과 감정을 말한다면 치졸한 새끼, 나쁜 새끼라고 욕을 할 걸 알았다. 


그동안의 7년의 생활은 자신이 봐도 답이 없었다. 연주에게 너무해도 너무했다 싶은 걸 알았지만 익숙해졌고 당연시되던 감정과 행동들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을 따르고 행복해하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이 정도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만나기도 어려웠고 어린 시절에도, 살아오는 동안 받아본 적 없는 수준의 사랑이었다. 어딜 가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무엇을 해도 알려주고 싶어 하던 연주였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해야 행복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며 사랑을 표현하였던 사람이었고 현우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랑에 대해 불편함과 회피, 불안과 어우러진 사랑이 공존하면서 더 외면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연주는 외면하였으면서 자신의 아이에게는 엄청난 감정이 든다는 것이 우스웠다. 웃기게도 자신도 사랑만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현우는 줄곧 외면하던 이 감정들이 다른 방향으로 터져 나온다는 걸 알아채며 조금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방어하고 부정하던 감정들이 자신의 자식으로 인해 자신을 쏘는 화살이 될 것처럼, 깊은 감정을 급속도로 느끼도록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똑같이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하면서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 될 걸 점차 아는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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