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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l 31. 2023

학교 - 서로 어우러지는 곳

서로 어울리면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교가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것은 아이 성향 문제이자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목적에 따라 다른 것 같다. 홈스쿨링이나 대안교육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처음 접했을 때 '가시밭길'을 걷는구나하는 무지함이 있었다. 필요함보다는 단순하게 '나는 못해.'라고 어려움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혹은 아이가 정규 학교 시스템을 견디지 못해서 선택했을까 궁금했다.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해가 갈수록 다양한 성향의 아이를 만나면서, 내 아이의 홈스쿨링을 잠깐 고민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학교보다 아이에게 더 좋으리라. 학교가 늘 기본이라는 생각때문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수능 준비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현실에 와보니 꼭 반대할 만한 일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생각을 돌고 돈다. 그럼에도 결론은 같다. 시간을 돌린다 해도, 선택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 해도 역시 아이를 학교에 보낼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남들이 다 보내서가 아니라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다 안전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아이가 성장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사회 안에서 타인과 원만하게 소통하고 어울리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면서 서로 넘지 말아야 하는 한계점을 알아야 한다. 마음대로 다 할 수 없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에도 사회적 기술을 필요하다. 학교 안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계속 부대끼면서 여러 상황에 놓인 채 사회적 감각을 익힌다. 친구들과 놀면서 혹은 싸우면서 내가 취해야 하는 행동,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스스로를 다듬어가게 된다.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를 적절하게 맞추어가는 과정을 통해 내 언행의 사회적 적정선을 알아가는 것이다. 나와 타인의 욕구를 조율해야 하는 필요성을 알고 방법을 배워가는 곳이 학교인데 여러 가지가 이런 목적을 지닌 학교의 발목을 잡는다. 

  

  우선, "내 아이"만을 바라보는 부모로부터 시작된다. 내 아이의 말만 믿고 상황을 판단하고 내 아이의 불편함, 받은 상처만 보다 보니 다른 아이들의 입장이나 감정은 안중에도 없다. 다들 귀하지 않은 자식이 없는데 (교사마저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다.) 내 아이의 귀함만을 강조한다. 결국 이를 빌미 삼아 아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로 화해하고 어울리기보다 자기만 생각하고 행동해도 괜찮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해 주는 부모가 있어 아이는 사회화의 기회를 잃게 된다. 왕자, 공주의 모습으로 대접해 주기만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교사이거나 주변 친구이거나 상관없이 본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작은 손해도, 상처도, 감정 상함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감당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본인은 존중받아야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도 존중하지 못한다. 


  또 하나, "아동학대"의 기준이 어마무시하게 넓어져서 교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교사가 화내는 것, 여러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혼내는 것, 손을 많이 들었는데 발표를 시키지는 않는 것,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 타임아웃을 시키거나 서있게 하는 것, 휴대폰 사용에 제재를 두는 것을 비롯해 난폭한 아이의 손을 잡는 것도 학대에 포함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하루에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학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묻고 싶다. 아이들이 엉겨 붙어 싸우는데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냐고. 그냥 두면 방임이라 하고 상관하여 제지하면 학대라 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못된 행동을 어떻게 고쳐주어야  하는지,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꺼내 노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크게 울고만 있는 아이와 수업을 방해하면서 큰소리로 떠들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어떻게 할지 진짜로 묻고 싶다. "학대"라는 단어가 아이의 사회성을 키워주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아이를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는 교사가 되려 아동학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학교는 아이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며 사회성을 기르는 곳이다. 좋은 사람만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교육기관으로서의 명목이 있고 그 체제를 유지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기에 여러 모로 안전하다. 싸움이나 문제가 생겨도 중재자가 있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사람들과 안정된 시스템이 있는 곳이다.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진짜 사회에 나가기 전에 경험으로 훈련하고 배워가는 곳이다. 

아이가 나이를 먹어서 사회에 나가도 여전히 캥거루족처럼 아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것이 아니라면 안정된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면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게 두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아이 옆에 있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은 앞으로 부모보다 오래 함께 같은 세상에서 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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