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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Aug 02. 2023

학교 - 홀로 서게 하는 곳

학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개체로 홀로 서게 돕는 곳이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민들레 격월간지 슬로건이다. 이 말을 혼자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스스로 서야 결국 서로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일까. 교육을 통해 스스로 서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고, 서로를 살리게 하자는 것일까. 남들이 보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혼자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본다. 어쩜 "스스로 서서"라는 것과 "서로를 살리는"이라는 두 가지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존경하는 선배선생님의 교육적 목표가 떠오른다. "홀로 서는 사람"으로 키우자는 것이 선생님의 궁극적 목적으로 이를 위해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키워주고자 하셨다. 홀로 선다는 것, 결국 스스로 서있는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기에 학교라는 공통분모적인 요소들이 많은 공간에서 부모와 교사가 협력해야 한다. 


온실 속 화초를 세상에 심기 위한 연결고리, 학교

  요즘 부모는 아이 앞에 놓여 있는 작은 불편함을 본인이 견디지 못해 해결해주고자 한다. 준비물이나 교과서가 없으면 불편할까 봐 학교로 갖다 주는 것부터(아이들은 이런 부모를 '퀵서비스'가 있어 걱정이 없다 한다.) 아이가 혼날까 봐 아이 대신 변명을 해주고 감싸안는 것, 아이의 싸움에 개입해서 교사 또는 상대부모에게 전화해 사과하거나 사과를 받는 것 등 아이의 온실이 되길 자초한다. 이런 아이는 다른 사람과 사귀기 위해 맞추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과 다른 성향의 아이를 쉽게 배제해 버린다. 아니면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선생님과 맞지 않으면 부모가 민원을 넣는다. 심한 민원이나 항의를 받은 교사는 선을 긋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아이는 또다시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공간에서 원하는 대로 지낸다. 아무것도 참지 않아도 되며 견디지 않아도 된다. 정 안되면 전학을 간다. 

이렇게 온실 속 화초로 길러진 아이는 약간만 더워도 덥다 하고 추워도 춥다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작은 피해를 입으면 난리가 난다. 본인의 편함을 최우선하기에 협력하지도 배려하지 않음으로 불편함을 끼친다. 자기 안위 외에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음으로 공동체가 되길 거부한다. 세상에 나갈 힘을 갖지 못한다. 


  부모는 언제까지 아이를 품고 살 수 있을까. 품속의 자식으로 언제까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지 않아도 괜찮은 아이는 부모 없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지, 다른 사람과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더불어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한 삶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이 스스로 무작정 온실을 튀쳐나가기 전에, 혹은 영원히 머무르고자 하기 전에 부모는 건강하게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 시작이 아이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본인이 불편해봐야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한다. 즉, 부모가 대신 해결해주지 않음을 알 때 아이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발을 내딛는 것이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방향에 대해 고민하면서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게 돕는 것은 아이가 홀로서기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온실과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고리가 되는 학교에서 덜 상처받고 덜 힘들게 아이가 홀로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불편함을 견디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은 홀로서기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아이가 스스로 하게 만드는 기회 공간, 학교

  요즘 온라인 커뮤니티에 떠돌아다니는 진상부모 체크리스트의 '진상부모단골멘트'만 봐도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진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 아이가 교사에게 밉보일까 봐 오해받을까 봐, 혼날까 봐 하는 부모의 걱정과 불안이 엉킨 마음이 읽힌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보다 불안이 더 큰 것이 문제인 거 같다. 부모는 아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이를 향한 모든 부정적인 경험, 어려움, 불편함을 막아서는 방화벽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동시에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아이는 언제부터 혼자 다 할 수 있을까. 부모가 더 이상 도와주지 않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이다. 학교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한 공간에 있어서 가정에서와 달리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밥 먹는 것부터, 책상정리, 가방정리 등 서투른 손길로 시작해 능숙해지는 과정을 겪는다. 처음부터 잘하지 않아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물론 이 역시 가정에서도 함께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이 더디게 성장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침대정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은 작은 일을 스스로 하면서 성취감을 얻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아이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해 편하게 숨어 있을 뿐이다. 날개를 펼칠 기회가 없이 자란 새는 날지 못한다. 아니, 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날지 않아도 먹이를 물어다 주는 부모새가 있으니 굳이 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필요성을 느끼고 약간의 다급함과 긴장감을 느껴야 날개를 펴고 날아보고자 한다.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은 부모이고 또 안전하게 날 수 있는 세상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다쳐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격려하는 공간에서 이제 아이가 홀로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이의 독립은 사실 부모가 아이로부터 먼저 독립해야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실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혼자 해가면서 아이는 홀로 서는 힘을 갖는데 부모가 그 기회를 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온실 속에 넣고 키울 수 없기에, 그 인생의 마지막까지 책임져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아이가 홀로 설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엄마의 뱃속에서 떨어지는 첫 번째 분리를 시작으로 어린이집-유치원-학교라는 공간으로 육체적인 분리가 이루어지고 끝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정신적인 독립까지 건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그들은 부모라는 작은 온실에서 나아가 세상에서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홀로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밀어내야 한다. 나의 부속물이나 종속물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의 개체로서 그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학교는 아이가 홀로 설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되어줄 것이다. 그 공간을 통해 교사와 부모가 같은 방향을 보고 나아간다면 아이는 건강하고 행복한 독립체로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을 살아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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