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Jun 12. 2024

씨앗 하나

사람을 변하게 하지 못해도 마음을 조금이라도 흔들면 성공이다.

  한 때는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를 변화시키거나 성장하게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노랫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성인은 쉽게 변하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지만 어리면 어릴수록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고 변화도 크다. 아이를 만나고 일 년 동안 함께 하면서  모습에 기쁨을 느꼈다. 특히, 장난을 지나치게 하거나 산만한 아이, 말썽 부리거나 반항심이 크거나 성실하지 못한 아이도 나를 만나면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고 뭔가 자기의 나쁜 행동을 제지하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좋은 습관을 만들어가면서 나름의 반항기도 꺾었다. 순한 양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냥 아이는 나에게 순응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 자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짧게는 방학이 지나서, 길게는 학년과 반이 바뀌고 나서 만나는 아이는 교육의 결과가 도루묵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공든 탑은 무너져서 기초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뒤로하고 처음에는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점점 가르치는 것에 회의감이 느껴졌다.


  그렇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힘든데 타인을 어찌 그리 쉽게 바꿀 수 있을까. 아이가 크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노력은 물론 한 가정의 양육자가 변해야 한다. 즉, 매우 어려운 일이고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아이가 바뀌려면 양육자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한낱 교사가 그것도 일 년밖에 만나지 않으면서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기대했다니 얼마나 이상적이었던 것일까. 아니, 얼마나 어리석었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꺼진 촛불처럼 희망은 사그라들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약간의 무력감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나의 교육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가르친다는 말보다 한 공간에서 아이를 만나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서로 배움을 주고받는 일이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 삶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를 바꾸고 싶은 욕심이 들었나 보다. 문제 있는 녀석이 나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달라지길 엄청 바랐나 보다. 학부모 상담을 통해 아이를 향한 진심을 전달하면 변화를 위해 모든 부모가 함께 노력하리라 믿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진심이 닿으리라 생각했다. 그 또한 나의 욕심이었다. 허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을 놓으려 하는 나에게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무 소용없는 일은 아닐 거예요. 지나가다가 선생님 말을 문득 기억해 낼 수 있고 조금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니까요."


그때는 그렇게 지나갔다. 어느 날부터 곰곰이 되씹어보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치는 것은 매일매일 정성껏 수많은 밭에 씨앗 하나를 심는 것이다. 어떤 씨앗은 뿌리도 내려보지 못한 채 썩을 수도 있고, 어떤 씨는 뿌리가 살짝 내렸다가 새싹을 틔우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아주 가끔,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튼튼한 나무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반 전체 아이들 중에서 어떤 아이는 간절하게 씨앗 하나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씨 하나가 떨어져 열매까지 맺지 못해도 괜찮다. 아주 조금이라도 파동을 일으킬 수 있다면 충분하다. 아주 작더라도 순간순간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면, 살다가 갑자기 혹은 우연히 한 번이라도 생각난다면 교육은 이미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 역시 배우는 사람으로 살다가 문득문득 마음의 흔들림으로 깨달음을 얻으니 말이다.


  부모나 교사나 지금 당장 아이의 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음을 이제야 인정한다. 수많은 잔소리 모두 흩날리다 아이 마음 어딘가를 건드려줄 수 있음을 기억하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겨야 하고 아이를 응원하는 진심이 닿기를 바라면 된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 만나는 것이 다시 즐거워졌다. 욕심에서 벗어나 우리는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한다. 서로 작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마음에 씨를 툭 던진다. 결과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마음에 닿길 바라면서 진심을 건넨다.

작가의 이전글 친절한 통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