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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Feb 15. 2023

완벽한 아이

완벽한 부모가 없듯이 완벽한 아이도 없다.

  욕심이 전혀 없다. 아니, 없어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상담을 받고 오신 엄마가 놀라셨다. 엄마는 당신 딸인 내가 욕심이 하나도 없는 줄 아셨단다. 물욕이 없어서 언니, 오빠에게 쉽게 양보하고, 귀찮아서 뭘 더 해달라고 하지도 않으며 먹는 것을 싫어해서 밥상에서 한숨을 내쉬면서 무엇이든 굳이 잘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에게는 욕심이 많은 아이라는 선생님의 평가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도 몰랐다. 내가 욕심이 많은지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귀찮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 귀차니즘의 산증인이다. 다만 자존감이 바닥이라 악바리처럼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비난받기 싫어서, 못한다는 소리에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보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 그런 내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욕심쟁이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떨렸다. 기뻤다. 세상 음식이 다 맛있어서 행복하고, 꼬물럭 거리고 발로 차는 것을 느끼면서 마냥 좋아했다. 철딱서니가 없어 엄마 될 마음도 준비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덜컥 세상에 나온 아기는 제3의 존재 같았다. 아무도 내게 아이 낳을 때의 진통이 건물이 흔들려 보일만큼 아프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 등에 센서가 있어 내려놓기만 하면 운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젖이 불어서 돌처럼 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아기가 젖병과 엄마젖을 구분해서 안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밤에 계속 칭얼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육아는 현실이었고 또 전쟁이었다. 몸이 힘든 것은 둘째치고 앙앙거리고 꼬물거리는 이 생명체를 어떻게 길러야 잘 기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에 스쳤다. 마음이 급해졌다. 세상 많은 것을 책에서 배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육아 관련 서적을 미친 듯이 읽는 것이었다. 마침내 엄마가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면서 정말이지 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왕 엄마 된 김에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것은 숙명처럼, 사명처럼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잘”이었다. 어떻게 키워야 잘 키우는 것일까. 어떤 아이를 보면서 잘 키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엄친딸을 꿈꾸었던가.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으면서 인성이 바르고 가치관이 뚜렷한 아이?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 다 갖춘 아이? 아... 욕심도 많아라. 사실 잘 들여다보니 나는 “완벽한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엄마인 내가 보기에도 “완벽한 아이”를 말이다. 완벽하지 못한 엄마이기에 어쩌면 더 완벽한 아이를 원했는지 모르겠다. 


  첫째는 순하지는 않았지만 똘똘했고 착했다. 예의가 바르며 얌전하고 성실했다. 아이가 걷고나서부터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어디 가나 사랑받았고 무엇이나 잘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야무졌고 당찼으며 잘 놀았고 한글도 금방 익혔다. 아이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난 그저 예의 바르고 착한 딸을 바라보며 뿌듯해하는 엄마였다. “잘” 키우고 있다는 생각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내가 없는 곳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제법 짓궂은 장난도 잘하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쌈닭이었다.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 예의범절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 생겼다. 아이는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자꾸 진짜 자기를 봐달라고 무언의 떼를 쓰는 것 같았다. 엄마가 만든 겉모습 말고 숨길 수밖에 없는 보석 같은 자기 모습을 봐달라고 일부로 그러는 것 같았다. 아이를 많이 알고 있다고 오만했던 나는 참 많이도 울었고 많이도 무너졌다. 내 욕심껏 아이를 잘 만들어간다고 오해했다. 그래서 아이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되려 더 완벽해지길 원하면서 많이 혼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완벽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결국 아이를 만들려고 했다. 5살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달랐을까. 공부와 인성이라는 차이일까. 남들이 보고 말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고집은 세지만 선한 마음을 지녔으며 조리 있게 따지면서도 상대가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아이라는 것을, 자잘하고 세세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깊은 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내 욕심으로 눈이 가리어졌다. 완벽하지 않은 아이의 모습을 장벽으로 높게 막아두었다. 나 같은 엄마 때문에 『완벽한 아이 팔아요』라는 그림책이 있나 보다. 완벽한 아이일수록 어느새 커서 완벽한 엄마를 원할 수 있는데 완벽하지 않은 엄마는 이제 어쩌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나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아이도 나도 컸다. “잘” 키운다는 것~ 그게 뭐라고. 뱃속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건강하기만 해라 했던 소박함이 떠오른다. 그때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아이 그대로를 사랑했다. 내게 와준 아이가 고맙고 3.7kg로 튼튼하게 세상으로 나와준 아이가 기특했다. 욕심은 부릴 때 부려야 하는데 나의 욕심은 엄한 데로 뻗어있던 것이었음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아서 다행이다. 아직도 매일 나는 아이를 향한 나의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도 닦는 마음으로 ‘내려놓아야지. 내 인생이 아닌데, 내가 아닌데……' 많은 일로 깨지면서 나는 비로소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아이를 둘러쌓고 있던 막이 벗겨졌고 아이와 나 사이에 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내가 원하는 아이의 모습과 진짜 아이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얌전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고 무한 똘끼를 장착하고 있었으며 발랄하면서 진지하고 무엇하나 중간지점 없이 극과 극으로 튈 수 있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진짜 그 아이 그대로를 만난 것 같아 기뻤다. 젤리를 먹고 싶은 진정성을 보여주고 얻어먹겠다고 길을 걷다가 뜬금없이 앞 구르기를 하고 마지막 고기 한 점을 동생이 먹었다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엄마의 잔소리에 귀가 아팠다고 굳이 내가 모으는 띠부실 하나를 가져다가 우체통 안에 붙여놓으며 일 년 내내 빨지도 않은 실내화를 신고 다닌다. 예전과 달리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고 아빠랑 몸싸움도 서슴지 않는 고등학생 딸이 신기하고 기특하다. 엄마라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알껍질을 깨고 나와주어서 고맙다. 그동안은 어찌 그리 얌전하고 착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똘끼를 누르고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새삼 미안한 마음도 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을 잘 들었을 때, 내가 원하는 모습일 때가 몸은 편했다. 나의 욕심에 부흥하고자 노력할 때 뿌듯한 마음도 컸다. 지금은 뒤늦은 똘끼 행렬에 정신이 사납고 몸은 피곤하지만 투명한 관계로 더 많이 행복하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면서 그 관계가 더 깊어지고 진해졌다. 


  누구나 자식을 낳으면 “잘” 키우고 싶을 것이다. 욕심이 없던 사람도 자식에게 욕심을 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잘 키운다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나에게 떨어진 원석을 어떻게 다듬어줄 것인가. 사실 다듬는 것조차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닐지 모른다. 그 아이 스스로가 다듬어나가길 기다리면서 본인의 찬란한 빛을 빛낼 수 있길 믿어주고 기다려주면서 지켜주고 바라봐주는 것이 나의 역할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데로 휘리릭 깎아내고 가공하려다가 원석을 잃을 뻔했다. 나보다 더 멋지게 다듬어갈 아이인데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하다. 완벽한 부모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완벽한 아이도 세상에 없다. 다만 각자의 고유한 색과 빛을 가진 원석들이 있을 뿐이다. 욕심쟁이 엄마는 완벽한 아이를 원하지만 본인조차 완벽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는 용기, 그 아이가 스스로 다듬어나가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심, 아이에게 욕심내지 않고 인정해 주는 포용력을 지닌 부모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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