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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Apr 12. 2023

엄마의 탯줄

아이와 부모를 연결하는 선이 최전방에 나와있지 않아야 한다.

  첫 아이 임신, 누구나 그렇겠지만 신기하고 기뻤다. 아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낼 때 아기가 내 속에 있다는 느낌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아기와 나는 분명 연결되어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탯줄로, 심리적으로는 한 몸에 있다는 사실. 달이 차고 아기가 나왔다. 탯줄은 잘렸고 아기는 내 몸에서 나와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굵고 튼튼한 줄을 느끼고 지냈다. 아기의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 그 마음을 읽어주는 것, 옹알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줄 덕분이었다.  기꺼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고 그러면서 그 끈이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이 단단하고 견고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크면서 연결된 그 끈이 끊어질까 봐 걱정하면서 조금 길게 풀었다.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툭 끊어질까 봐 얇게 그리고 길게 늘어트렸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그 줄, 어느 날 툭 끊겼을 때 우리는 서로 자유를 느낄까. 안타까울까. 지금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 끈의 존재함을 잊고 있지만 누구보다 잘 안다. 서로 얼마나 깊이 연결돼있는가를.


  부모는 아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기 전까지 늘 연결되어 있고 싶어 한다. 품속에서 아이는 안전하다. 온실 속의 화초로 적절한 온도와 적당한 물은 아이를 위기 없이, 갈등 없이 곱게 키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와서도 탯줄부터 시작된 부모와의 끈은 쉬이 끊기지 않는다. 어쩜 부모가 더 초조해하며 그 줄을 움켜쥐고 있것은 아닐까. 아이는 학교에 와서 씩씩하게 잘 지내는데 부모는 무심코 하는 아이의 한마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이와 연결된 그 끈, 누구를 위함일까. 무엇을 위함일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겠냐만은 아이는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되어 있는 그 시선과 마음이 때로는 부담스럽지 않을까. 말하고 싶지 않은데 다 말해야 하는 기분이 편안하기만 할까. 일이 생기면 부모는 아이와 연결된 그 줄을 당겨 아이를 자기 뒤에 숨긴다. 화를 내는 것도, 일을 해결하는 것도 부모의 몫이다.

아이는 주체적으로 사는 듯 하지만 어떤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혼자 결정하지 못해 우왕좌왕이다. 자신의 결정과 부모의 결정이 같지 않을 수 있는 두려움이 있고,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부모 뒤에 있는 것이 편한 마음도 있다. 부모는 기꺼이 아이의 대변인이 되어주지만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주체성을 잃어간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고 친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가 한 명의 고유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떨어져 나가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아이는 답답해하면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두려움을 제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어느 날 문득, 시퍼런 날의 가위로 그 끈을 끊는다면 부모는 큰 상실감에 어찌할 줄 모를 것이다. 아이가 가위를 들기 전에 부모가 서서히 그 끈을 얇게 늘어지게 두면 어떨까. 바운더리는 있되 그 안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다 보면 끈의 존재를 느끼지도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존재함은 알게 하면 어떨까.

아기와 부모는 여러 번의 분리를 겪는다. 몸에서 나와 탯줄이 끊겨 첫 번째 물리적인 분리가 이루어지고 스스로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한번 더 부모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어린이집 또는 유치원이라는 작은 사회에 들어가면서 부모로부터 떨어져서 생활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분리를 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부모가 더 분리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통제에서 벗어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를 곁에 메어둔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독립"을 부모로부터의 버림으로 생각하여 스스로 연결된 그 끈을 끊어내지 못한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분리불안을 느끼는 듯하다.

부모가 건강한 분리를 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끈을 툭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신뢰" 속에서 그 끈이 어느새 스며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게 응원하면서 "책임"지게 하면서 곁에서 지지해 준다면 불안 없이 아이는 홀로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적절한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미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준비하고 서서히 아이와 연결된 그 끈을 녹여가야 한다. 해마다 조금씩 녹이다가 고학년부터는 존재함 그 자체를 잊게 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의 행복을 바란다. 아이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홀로 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부모의 한없는 사랑과 지지를 바탕으로 혼자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실수해도 괜찮고 서툴러도 괜찮다. 남에게 조금 피해를 주면 어떠한가. 그것을 인지하고 방향을 수정하고 나아간다면 그 속에서 홀로 잘 서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림책이 떠오른다. 누군가 그렇게 해석했다. 엄마로 분해서 따라오는 호랑이가 사실 엄마 본인이라는 생각에 해석 했다고 한다. 커가는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면 결국 그 아이들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지금에서야 그 해석이 조금 이해가 된다.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하는 부모가 결국 불안으로 인해 아이를 잡아먹어버리는 비극, 이제 멈추어야 한다. 하늘에서 새 동아줄이 내려와 아이들을 데려가기 전에 아이가 씩씩하게 내 안에서 걸어 나가길 응원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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