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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운 May 18. 2021

90년생 이야기

제주도로 도망간 백수,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낭만 페이


 낭만에는 돈이 든다. 뭐 멋있게 살려면 돈이 필요한 법이지. 뚜껑이 열리는 외제 차를 타면서 해안가를 달리고, 이름있는 호텔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열정페이가 우리의 열정을 낮은 값어치로 평가받고 그것조차도 생색내는 기업에게 더럽고, 치사하다 정말... 하면서 받는 돈이라면 낭만페이는 조금 다르다. 아침으로 먹는 해물라면(해물 안 좋아 함), 도시보다 확실히 비싼 뷰 좋은 카페, 그냥 적당히 저녁을 때울 수도 있지만 얼마 먹지도 못할 피자를 포장해서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눠 먹는 그런 소소한 사치비용이라고 할까?  뭐 진짜 돈 아깝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사치들이 나를 그냥 퇴사한 지 얼마 안된 백수가 아니라 내 열정을 갉아먹는 도시에 지쳐 멋지게 때려치우고 제주도로 충전하러 온 근사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낭만페이에는 돈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제일 큰 기회비용 바로 "시간". 낭만페이는 나를 근사한 여행자로 만들어 주지만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이곳을 벗어나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그냥 한 달을 놀다 온 백수가 될 뿐이다. 남들이 나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보다 나 자신이 그렇게 느낄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이곳에서 한 달 동안 무언가를 얻고 가야 한다. 낭만페이로 지불하는 나의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가자.  오늘도 떠오르는 수많은 감정들과 영감을 고스란히 가져가기 위해 펜을 들었다.


 


김 치 찌 개 리 뷰


 곽지를 지나갈 때 보면 항상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곳이 보인다. 무슨 맛집인가? 하며 그냥 지나쳤었는데 여러 번 지나가다 보니 그곳이 랜디스 도넛이라는 걸 알게 됐다. 궁금해서 가보니 오후 3시에 벌써 다 팔려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 해봤다. 무슨 도넛 가게에서 기념 티셔츠만 잔뜩 있다. 건물 앞에 있는 도넛 모형만 기념으로 사진 찍고 돌아선다. 솔직히 도넛은 좋아하지도 않아서 미국 여행 가서도 한 번 밖에 안 먹어 봤다. 너무 달아.... 그치만 제주에서 한 달이나 있는데 안 먹고 돌아가면 섭섭할 거 같기도 해서 애월에 있을 때 먹어보자 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김치찌개를 조지러 먹으러 간다. (제주에서 밥 먹고 싶어도 1인 메뉴 파는 곳이 많지 않아 찾으면서 다니는 것도 일이다.)



 맛집이라고 알려진 집은 아니었지만, 구글 리뷰에 1인 찌개 가능한 곳인 것만 확인하고 무작정 찾아간 곳. 난 그곳에서 악마를 만나고 말았다. 내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악마... 남자치고는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 밥 한 공기만 먹어도 배불러서 헉헉대는데 5분도 안 돼서 절제하지 못하고 라면 사리까지 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마치 일주일은 굶은 야수 같았다. 이 김치찌개 집은 나에게 숨어있는 야성을 찾아준 것이다. 야수의 심장으로... 김치찌개를 무자비하게 폭행해 버렸다. 쫄아서 국물까지 더 짭짤해진 녀석을 마지막 한입까지 집어삼키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게 내가 알던 그 김치찌개가 맞나? 이 집 김치찌개는 정말 전설이다. 사람이 없는 공터 주차장에서 마음껏 포효 한 뒤 숙소로 향한다. 도넛 따위... 내일 생각이나 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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