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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Jul 21. 2020

파나마의 최고봉에 20불짜리 텐트를 쳤다

3474m 바루 화산 정상에서 보낸 하룻밤 2



'너희 은하수 지붕에 구름 이불 덮고 잤구나'


한 보께떼냐*가 말했다. 웰컴 드링크를 따르며 이 낯선 여행자들이 보께떼에서 뭘 하고 있는지 물어보던 차였다. 서비스 정신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였겠지만 그녀는 산 정상에서 뭘 봤는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산에서 하룻밤 보내고 하루가 지났지만 피로와 근육통, 잊지 못할 경험이 남긴 흥분감에 여전히 휩싸여 있었다. 이 화산에 오른 경험에 대해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살짝 고민이 됐다. 힘듦? 아름다움? 아님 의미론적 접근? 듣는 이들은 경험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걸 더 좋아하지만, 말하는 이에겐 쉽지 않은 선택이다. 힘듦부터 말하는 게 가장 쉽지만, 그녀가 보꼐떼냐인 걸 감안할 때 그 아름다움에 대해 칭송하는 것도 좋은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장 흔한 대답을 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고.





(*보께떼 지역 출신을 지칭하는 집합 명사)

3474m 바루 화산 정상에서 보낸 하룻밤1 https://brunch.co.kr/@23hees/11

 











출발한 지 장장 9시간 만에 정상에 발을 디뎠다. 정상 입구로 보이는 곳엔 빛바랜 표지판 하나가 우릴 맞이할 뿐이었다. 사람도 없고 관광지로서 기대해 볼 법한 조형물도 전혀 없었다. 두두가 지친 나를 억지로 표지판 앞에서 세워 놓고 찍은 사진에 내 표정, 허탈한 표정이다. 정상에 뭐가 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정상에 이르렀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무거운 어깨 짐에서 해방될 걸로 드디어 살 것 같았다. 우린 가방을 캠퍼 사이트에 풀어놓고 대장정이 끝난 즐거움을 누리러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벌써 4시가 넘었다. 즐길 시간이 충분치 않아 보였다.







날씨가 좋으면 3474m 바루 화산의 정상에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한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아쉽게도 구름이 많아서 그 특별한 경험은 우리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발 밑에는 뽀얀 구름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마을에서는 그저 뿌옇게 흐린 하루였을 테지만 우린 구름 위 파란 하늘 아래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고지의 날씨는 분단위로 바뀌는 게 눈에 보였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른 뿌연 것이 계속 산을 넘어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했다. 눈 앞이 가린 듯 가득 매웠다가 또 사라졌다. 정상을 지나는 구름의 빠른 속도와 거대한 공간감이, 그리고 그로 인해 자칫 잘못하다간 꺾어지는 절벽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험 신호가 온몸을 짜릿하게 휘감았다. 왜 사람들은 힘들게 높은 곳을 오르고, 땅을 내려다 보길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텐트를 쳤던 언덕 끝과 이사한 수풀 속 텐트





해가 지기 전에 얼른 텐트를 쳤다. 어둠 속에서 랜턴 빛에 의지해 텐트를 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20불짜리 텐트는 원터치 텐트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쉽게 완성됐다. 이슬 막을 방수포도 돗자리도 없이 달랑한 텐트에 10불짜리 침랑 두 개가 펼쳐졌다. 텐트 속에서 들어가니 얇은 비닐막일 지언정 보금자리가 생긴 것이 안도가 됐다. 우리는 저녁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단출하게 크래커에 참치캔을 따서 얹어 먹었다. 초코바도 하나씩 집어 먹었나 보다. 피로로 허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먹어야 했다. 움직임을 멈춘 몸에 냉기가 들었다. 속옷이 땀에 젖고 고도가 높아지며 기온이 떨어졌다. 벗고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그대로 입은 채 장갑과 목도리 양말을 껴입고도 하체에 담요를 둘렀다.





일몰, 실루엣만 봐도 두두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고 해가 기울었다. 우리가 목표로 하던 시간이 다가왔다. 일몰의 시간. 따로 또 같이 정상에서 시간을 보내던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 나란히 섰다. 깔린 흰 구름 위로 사라지는 하루의 빛줄기와 변해가는 하늘 색. 환상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옆의 이 사람 외엔 아무도 없는 파나마 최고지에서 해는 땅 밑의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우리만을 위한 지상 최대의 쇼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이나 '평범한 날'이란 말을 쳐부수는 듯 화려하게. 그날만은 우리가 파나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본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구름 아래로 해는 금방 떨어졌고 산 위의 밤이 시작됐다. 우리는 한 차례 이사를 감행했다. 우린 캐이블 타워가 설치된 부지 구석의 나무 덤불 사이로 들어갔다. 절벽 끝에 있던 것보다 바람도 비도 잘 막아 줄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단 바닥에 돌멩이를 완전히 고를 수 없었다. 침낭에 완전히 들어가기 전에 가방에서 소중한 핫팩을 뜯어 옷 위 아랫배에 붙였다. 자기는 괜찮다고 우기는 두두의 몸에도 붙여줬다.


랜턴을 끄자 한 줌 있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드러났다. 시각이 무력화되니 청각이 예민해졌다. 바깥에서 들리는 온갖 소리에 신경이 집중했다. 야생동물은 없길 밤에 비가 내리지 않길 바라는 찰나, 드르렁. 무신경한 1인의 로그아웃 소리. 두두가 잠에 빠졌다는 신호였다. 와 대단하다 진짜. 진심으로 대단했다. 이 낯섦, 어둠, 추위, 무방비한 상태에서 1분 만에 잠이 들다니. 나는 한동안 바깥의 새소리 바람소리 이유 모를 부스럭거림에 집중하다가 잠에 빠졌다.






오한이 들어서 깼다. 몸을 뒤척이자 냉기와 근육통에 굳은 몸이 겨우 움직였다. 너무 추웠다. 젖은 옷을 벗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배에 붙인 핫팩을 시린 등허리에 옮겨 붙였다. 하루 종일 열기가 유지된다던 핫팩은 10시간도 채 되지 않아 식어가고 있었다. 팔을 꺼내 보니 침랑 외피가 축축했다. 텐트는 역시 이슬을 통과시켰고 바닥과 텐트 실내 전체가 축축했다. 바닥은 또 얼마나 딱딱한지 아무리 자세를 옮겨봐도 돌부리 하나씩 몸에 걸쳐졌다.

두두를 돌아봤다. 조용했다. 코골이나 구강호흡 중 꼭 하나는 했을 두두가 조용하니 괜히 별스런 생각이 들었다. 자는 두두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따뜻한 콧김. 그랬다. 우리 두두는 숙면 중이었다. 이 무던한 인간, 추위에 몸 어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네. 잠 잘 못 자는 자기가 고생스러운 줄은 모르고 잠 잘 자는 두두를 보고 연민이 들었다. 담요를 나눠 덮고 한 팔로 안아줬다. 이 멍청이! 내가 안 챙겨주면 안 되지. 그렇게 안 챙겨줬어도 꿀잠 자고 일어났을 두두였다.









텐트 지퍼를 열어고 빼꼼히 바깥을 내다봤다. 하늘에 별이 은하수가 시선을 압도했다. 놀래서 두두를 깨웠다. 바깥에 가자, 별 보러 가야 돼. 새벽 냉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추웠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내 몸뚱이가 아쉽다. 두두는 일어나자마자 노상방뇨를 나갔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여기서 낙상 사고 있었단 기사도 있더라 아내 발 주의보를 수차례 듣고 사라졌다 돌아온 두두는 그곳에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분뇨의 흔적이 여럿 있더라는 후기를 남겼다.

우우우웅. 어둠을 뚫고 다른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산 위에 울려 퍼졌다. 이내 웅얼거리는 사람 소리와 랜턴 빛이 어둠 위로 비쳤다. 화산 정상을 왕복하는 픽업트럭에서 보이는 관광객 서너 명이 내렸다. 와 사람이다! 십 수 시간 만에 만난 낯선 사람이 반가웠다. 그러다 이내 저들보다 먼저 높은 자리의 뷰포인트를 점거해야겠다는 유치한 경쟁심리가 발동했다. 오빠 어서 가자. 우린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바위 언덕에 자리를 틀었다. 일출의 시간이다.









가파른 언덕 바위틈에 바짝 붙어 앉았다. 칼바람에 코끝이 아렸다. 여명이 밝아왔다. 어둠이 걷히며 비로서 드러난 동쪽 하늘은 캐리비안해의 파도 대신 구름이 일렁이었다. 산 아래 마을도 점점 그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태양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아마 구름이 뿔처럼 높게 솟은 저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원래 일출 볼 땐 소원을 빌어야 하잖아. 앉아서 소원 하나도 빌었다. 진한 오렌지색 일출이 은은한 빛이 되어 퍼지면서 하늘 가득 있던 별들을 밀어내는 한 동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해는 이미 세상이 다 밝은 후에 빼꼼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수평으로 세상을 비출 때, 땅의 구석구석을 부드럽고 공평하게 빛을 나눠 줄 때 세상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해돋이 일정 이쯤으로 끝내고 언덕을 내려왔다. 랜턴 빛에 의존해 걸어왔던 오솔길의 모습이 이제야 제대로 보였다. 우리는 가파른 능선에 서서 사진을 실컷 찍었다. 남은 사람들은 다시 우리 둘 뿐이었다. 차를 타고 올라왔던 사람들은 다시 차를 타고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텐트로 돌아와 아침식사라 부르며 초코바를 뜯었다. 밝은 상태로 처음 보는 텐트 내부는 훨씬 더 엉성했다. 원단을 박음질한 자리 따라 구멍이 벌어져 있었다. 밤중에 잠깐 내렸던 빗물도 이슬도 스밀 밖에. 새벽에 지인짜 추웠다. 간식 배를 채우며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토로했다. 나는 두두가 자기도 잠을 잘 못 잤다고 하소연하려 할 때마다 말을 끊어 먹었다. 아니 오빠는 잘 잤어. 너무 잘 자더라. 신기할 정도라니까. 두두는 머쓱해하면서도 자기가 잘 잤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즐거워 보였다. '행군 가서 산에서 자면 이 정도 추위는 별 것도 아니다' 으쓱해하는 두두.

우리는 쉽게 정상을 떠날 수 없었다. 올라 온 길이 너무 길고 힘들었던 탓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정상에 머물고 싶었다. 여기를 다시 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산은 7시간이 걸렸다. 주차해 둔 우리 자동차, 흰둥이를 보고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을에서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끼니를 다시 채우고 숙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꿀맛 같은 낮잠을 잤다.





















격리를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엔가 아, 볼칸 바루라도 가고 싶다 라는 말이 불쑥 나왔다. 이렇게 갇혀 있을 바에는 내가 경험한 가장 힘든 여행지, 그 화산이라도 한번 더 오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 여정에서 겪었던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단함이 없다면, 걷다가 원숭이 무리도 보고, 꼭 보고 싶던 새와도 마주치고, 이끼 낀 선선한 숲을 지나는 재미도 있었다.


혼잣말을 들은 두두가 그으래? 라고 되물었다. 동조하는 건지 반대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음, 아니,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 태워준다던 적십자사 픽업트럭 트렁크 얻어 타고 올라갈래. 라고 얼른 바꿔 말한다.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힘들었던 기억이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가정법에서라도 다시 그 편도 9시간의 등산과 추운 밤을 다시 겪는다는 건 너무 위험하다 생각했다. 이번엔 두두도 동조를 했다.


상상 속의 우린 차를 타고 정상에 이르렀다. 천천히 산 위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저번엔 못 갔던 칼데라 분지도 거닐었다. 해넘이 때가 되어 같이 그 황홀한 광경을 가슴 벅차게 마주한다. 상상 속이지만 석양을 더 잘 촬영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우린 어느새 일몰 관람을 끝내고 어둑해진 정상을 가로질러 우리 텐트로 돌아갔다.

나는 두두와의 짧은 대화 도중에  지난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산발적으로 떠올리고, 원하는 대로 전개시켜서 상상의 여행 시나리오를 하나 만들어 냈다. 그 상상의 여행기 속에서도 우리는 20불짜리 싸구려 텐트에서 밤을 보냈다.






하산 중, 최악의 산악로를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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