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라는 뜻의 스페인어 꽈렌떼나cuarentena가 숫자 40이라는 뜻의 꽈렌따cuarenta의 파생어인 것을 재미로 삼아 이 다음번의 격리는 40 다음의 숫자 50의 형용사, 씽꾸엔떼나(50, [씽꾸엔따] cincuent(a) -ena)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언어유희에 무릎을 탁 쳤지만 뒷끝은 씁쓸하다.
- 파나마 정부는 파나마시티와 주변 도시에 크리스마스 연휴를 포함해
새해연휴부터 1월 14일까지 완전격리를 시행했다.
작년 크리스마스와 신정, 2주 연속으로 금토일 사흘의 황금연휴가 생겼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오히려 격리로 긴 기간 외출하지 못하게 됐으니, 곳간 채워넣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평상시라면 슈퍼에서 상비하는 식료품만 대충 사고 나왔을텐데, 이번엔 비상시였다. 비장한 마음으로 채소가 전시된 냉장고 칸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나 잊고 못 사면 앞으로 사나흘은 없는 채로 지내야 되니 이번 슈퍼 방문을 잘 활용해야 한다.
냉장고를 둘러보던 중에 낯선 채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본 듯 만 듯 무시하던 식자재들이었다. 파나마 사람들은 익숙한 손길로 좋은 재료를 골라 담아 갔다. 파나마에 산 지도 벌써 3년 반이 되어가는데, 일상에는 익숙해졌을지언정 외국은 여전히 이국이었다. 정체된 해외생활이라니 매력이 없다. 저 낯선 채소들의 진열을 보니 그간 다가가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반성이 들었다. 해외살이가 생활이 되면 지루하고 불만투성이지만, 지나고 보면 그 향취가 문득 그립고, 충분히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이번 격리엔 파나마 음식을 배워 보기로 했다. 파나마가 미식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라도 배울 것 하나 없겠는가. 산코초를 해주겠노라 두두에게 선언하고, 취지를 브리핑했다. 좋다고 호응하는 두두는 이번 격리를 빌어 자기도 음식을 하나 배워서 만들어주겠다고 공언한다.
이것은 선순환. 두두가 새로운 요리를 배워보겠다니.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그간 그가 내놨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이 생각났다. 도무지 레시피 검색을 하지 않았던 그. 냉장고에 있는 모든 재료로(그것이 냄새나는 곱창이라고 해도) 파스타를 만들던 그는 요리계의 연금술사...(다만 결국 금을 연성해내지 못한 술사.)
낯설다 낯설어
우리는 새해와 함께 시작하는 이 격리 시즌의 목표를 세웠다. 격리동안 부지런히 잘 해먹자. 산코초가 쏘아올린 첫번째 신년 목표였다. 이름하야 산코초 프로젝트. 이 미니 프로젝트의 첫 번째 법칙도 정했다. 내게 새로운 목표의 자극을 준 이 파나마의 낯선 채소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산코초 프로젝트 제1법칙. 낯선 현지 식재료를 사용할 것
파나마식 산코초 만들기
Sancocho Panameño
산코초는 중미권 사람들이 흔히 먹는 수프다. 보통 큼지막하게 썬 근채류와 고기을 넣고 푹 끓여 속이 깊은 그릇에 담아 낸다. 각 국가별 지역별로 들어가는 재료와 향신료가 다르다. 파나마에서는 주로 닭고기를 넣은 산코초, 산코초 데 가이나Sancocho de gallina를 먹는다. 이 산코초를 보면 딱, 떠오르는 한국음식이 있다. 바로 삼계탕.
파나마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성공한 식당, 엘 트라피체 El Trapiche는 오전 11시 정도가 되면, 이 푹 삶은 산코초가 손님상에 나갈 준비가 끝난다. 이 시간쯤 식당엔 산코쵸에 추가로 주문한 흰 쌀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나마에서 만난 정겨운 정취. 꼭 주말 느즈막이 일어나 해장 국밥을 먹 한국의 풍속화가 겹쳐져 보인다.
- 과음 후에는 뜨끈한 국물로 속을 푸는 건 라티노들도 똑같은지 파나마에서도 해장용 음식이라고 한다.
아, 그런데 큰 문제가 있다. 이 도전을 앞두고 조리대 앞에 서니, 코끼리 뼈를 놓고 살아있는 코끼리를 모습을 상상하던 옛 중국사람이 된 기분이다. 나고 자라며 먹은 음식이 아닌 지라 먹어본 횟수도 손가락에 꼽힌다. 구글에 검색된 많은 '파나마 산코초' 레시피 중 가장 먹었던 것과 닮은 이미지가 있는 요리법을 골랐다. 그리고 산코초가 파나마 음식 중 제일 맛있다던 파나마 친구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 내 도전을 응원하며 그가 추천하는 레시피가 담긴 유투브 영상 링크를 전달했다. 내가 고른 레시피와 너무 다른데? 하마터면 엉뚱한 코끼리를 만들 뻔했다.
작년 코스타리카 여행을 다녀온 뒤, 코스타리카식 콩밥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때 음식 얘기를 자주 나누던 마리아라는 친구가 말했던 '요리시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세히, 절대 한국식으로 요리 하지마.'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너희 아시아 쌀, 너희 밥솥으로 요리하면 안된다고 강조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한국식 요리 스타일 대로 조리했더니 결과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만들어졌다.
이번엔 제대로 파나마식 산코초를 재현해 보자. 오리지널이 있어야 변주도 가능한 것 아니겠나. 파나마식 조리 스타일을 따르기로 다짐아닌 다짐을 했다.
산코초 프로젝트 제2법칙. 현지식 조리법, 오리지널 레시피 그대로 따라할 것
유까와 냐메(마). 냐메만 쓰기로 했다 로컬식대로
<산코쵸 재료> 잘려진 닭 한마리, 열대 마 약 1.3킬로, 양파 큰 것 하나, 물 4-5컵 마늘 4알, 꿀란뜨로 5잎과 3잎 따로, 오레가노 1티스푼, 후추와 소금 약간
주재료는 생닭과 냐메라 부르는 마 정도로 준비할 게 얼마 없다. 내가 갔던 식당에서는 마 뿐만이 아니라 유까와 옥수수를 다 넣었는데, 파나마 집밥 버전 산코초는 이렇게 마만 있어도 충분하다. 마의 껍질에 닿으면 피부가 간지럽기 때문에 장갑을 끼고 껍질을 두툼하게 제거했다. 그리고 아주 큼지막하게 썰어서 물에 담가둔다.
마의 이름이 귀엽다, 냐메
마늘은 잘게 다지는데, 특히 더도 덜도 말고 레시피에서 알려주는 계량 만큼만 준비하도록 노력했(?)다. 우리 한국인에겐 마늘은 향신료 보단 구황작물격 아닙니까. 습관처럼 정량의 배로 더 썰어 넣던 마늘은 오늘 딱 4쪽만 쓰기로 했다. 마늘과 후추는 꿀란트로, 오레가노와 함께 향신료로 남기자.
꿀란뜨로는 고수처럼 향이 강한 허브다. 꿀란뜨로는 고수보다 향이 더 센 듯하다. 고수 싫어하는 사람이 꿀란뜨로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꿀란뜨로는 시골 동네 어디든 자라고 있다. 잡초같이 생겼는데, 뜯어서 향을 맡아보면 확실해진다. 꿀란뜨로 맞네. 흔한 식재료인 만큼 파나마 요리에 자주 첨가된다. 호불호가 강한 풀이지만, 산코초에서 꿀란뜨로는 필수다. 산코초만의 특색을 꿀란뜨로가 만들어낸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탕에 들어간 꿀란뜨로의 향은 생각보다 거북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꿀란뜨로 Culantro
재료 준비
- 닭은 껍질을 벗기고 깨끗하게 씻은 뒤, 후추와 소금- 으로 밑간을 해둔다.
- 마(대략 1킬로)는 삶으면 물러지고 풀어질 것을 감안해 큼지막하게 썰고 물에 담근다.
- 양파(큰 것 하나)는 숟가락에 올려 먹을 정도의 크기로 썰어 둔다.
- 꿀란뜨로 5장 분량과 3장 분량을 따로 다진다.
- 마늘 4쪽을 다진다.
요리 시작
1. 속 깊은 냄비에 올리브유 2숟가락과 다진 마늘, 양파를 넣고 살짝 볶는다.
2. 1의 위에 닭을 넣고 함께 볶는다.
3. 닭이 어느 정도 튀겨지면 4-5컵의 물을 붓는다.
4. 바로 다진 5장의 꿀란뜨로 넣고, 오레가노 1티스푼을 넣고 섞어준다.
5. 20분 동안 끓입니다~
6. 물을 버리고 마를 넣어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인다. (불의 세기에 따라서 20분 미만)
- 수시로 저어주고 확인하기
- 마가 푹 삶아져 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기
7. 필요한 소금간을 더 하고, 남은 꿀란뜨로 3장을 다져서 넣기. 그럼 끝!
꿀란뜨로와 오레가노가 더해져 향부터 풍미가 돈다. 국물부터 떠 먹어본다. 닭이 푹 고아진 육수에 마가 어우러져 걸쭉하고 단 맛까지 돈다. 두두는 한 숟가락 풀 때마다 어우 맛있어. 삼계탕보다 더 내 스타일인데 라고. 마가 이렇게 맛있고 쓰임도 다양할 줄이야. 뜨거운 국물에 풀어진 마의 식감은 감자랑 비슷하다. 모르고 먹으면 마인 줄 모를 것 같다. 한국의 장이 들어가지 않다보니까 향신료 자체의 맛이 더 두드러졌다. 닭국물에 같이 조리된 꿀란뜨로와 오레가노의 조합이 아주 좋았다. 맛을 표현을 두두처럼 단순한 말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다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