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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Jun 29. 2020

제일 비싼 와인부터 마실 거다

파나마 완전격리 백일의 소회






"나는 이제 제일 비싼 와인부터 마실 거다. 

다 필요 없어, 우씨"




파나마에 금주령이 해제되고 어느 날 두두는 엄포를 놨다. 각오를 다지는 모습에서 분노와 함께 약간의 억울함이 비쳤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에 고개 돌려 그를 쳐다봤다. 180센티의 키의 상체가 발달한 몸매, 마흔 줄에 들어선 남자 성인의 저 말이 아내에겐 여지없는 앙탈로 이해됐다. 그리고 '나도 이제 와인은 플렉스 할 거다' 라는데, 결국 풋 웃음이 났다. 여섯 일곱살 나이 차이가 나는 우리 커플에게 신조어 사용은 내 담당. 전에 플렉스가 무슨 뜻이냐고 묻던 그의 입에서 요즘은 플렉스 플렉스 소리가 자주 나오는 중이다. 말 배우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당연 내 눈에만!)




왜 와인 한 병을 들고 서서 괜한 성질을 내는지 알 것도 같았다. 금주령 시행으로 두 달가량 파나마 전역의 주류 코너는 노란 금지띠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와인을 뜯으며 이젠 당분간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다행이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그래도 집엔 여러 종류의 술들이 남아 있었다. 올 초에 어떤 칵테일에 반해서 집에서 제조해 먹느라 사둔 게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이야. 하지만 가끔 맥주 마셔야 되는 날, 와인이 어울리는 저녁에는 보고 싶은 친구를 회상하듯 맥주나 와인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다. 

이후 금주령이 해제되고 한 사람당 1병의 주류 구입이 허락됐다. 두두는 외출이 가능한 날마다 나가서 와인을 사야 된다고 고집스럽게 나갔다. 술 때문에 자주 외출을 하게 되는 거면 차라니 구입 제한을 두지 않는 게 나아 보였다. 




최근 드디어 술에 대한 모든 제한이 풀렸다. 그리고 두두의 와인 셀렉션은 달라졌다. 전보다 다양한 가격 범위에서 품종과 국적에 매이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아무 병이나 골라왔다. '이 와인은 빈티지가 멋있어서 사 왔어', '이 와인은 병 모양이 와인 같지 않아서 사 왔어' 자신의 선택을 브리핑했다. 맛에 있어선 안전지향적이었던 두두가 이제 와인 세계의 모험가가 되고 있다. 이제 집에 있는 와인 중에 제일 기대감이 큰 와인을 먼저 식탁에 올렸다. 그가 말하는 비싼 와인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 저녁 식사는 새로운 와인이 더해지며 더 풍성해졌다. 적당하게 찬기가 남은 와인을 뜯어서 한 잔씩 따르고 첫 한 모금의 향과 맛을 음미한다. 진지한 자세로 꼼꼼하게 분석적으로, 그러다 마무리는 유치하게. 

'마치 바람 부는 들판에 서 있는 여인의 머릿결이 느껴지는 듯 해.'





하루를 마무리하며 와인을 따는 건 기대되는 일이다
















격리생활에 대비해 집안 생활용품을 확인하느라 집 안의 모든 수납장을 다 뒤졌다. 내 서랍장엔 두두보다 더 많은 '비싼 와인'들이 잠자고 있었다. 올봄에 산 재킷, 한국에서 가져온 화장품, 골뱅이캔, 시아버지가 챙겨주신 과자들, 가끔은 실하고 예쁜 사과랑 아보카도들에도. 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편애의 감정을 가졌었다. 외국에 사는 탓에 한국서 가지고 온 물자들이 귀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요즘 판데믹을 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물건은 자고로 쓸 수 있을 때 써야 미덕이다. 

쭉 물건을 사례로 들고 있지만 물질주의나 소비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좋아하는 걸 즐기는 자세에 대한 것이다. 사물을 이용해 어떤 즐거움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내 즐거움의 요소를 얼마나 아껴왔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미룬다고 나중에 더 큰 즐거움으로 오지 않는다.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전 세계에 전염병이 도는 상황은 영화 속 설정에 더 가까웠지 현실이 될 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이 특수한 상황에서 하필 나는 파나마에서 백일째 칩거 중인 것처럼.




완전격리 조치로 인해 움직임의 자유가 통제 되는 것만으로 만남, 운동, 쇼핑, 여흥,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삶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큰 부분 사라졌다. 통제된 상황에서 지내면서 비로소 과거의 사소한 일상이 사실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단 걸 알게 된다. 박탈로 인해 느끼는 갈증들이 극대화되어 느껴진다. 트래킹을 하고 싶고, 산새 소리를 듣고 싶고, 파도에 온몸을 처박고 싶고, 태양 아래 가만히 등을 지지고 싶고, 새 옷을 입고 인도를 걷고 싶고, 그리고 훌륭한 와인을 찾아 마시고 싶다.

다시, 일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때 돌아오면, '별로 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그 순간을 아주 아낌없이 즐기겠다. 좋아하는 일에 있어서는 돈이든 시간이든 노력이든 가능한 모든 삯을 들여 온전히 즐거움을 누리겠다. 두두의 다짐처럼 나도 이제 비싼 와인부터 마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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