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편물을 사물함에 넣어두었습니다. 찾아가세요.’
뭔가 특별한 게 왔나 보다. 학교에는 많은 우편물이 수시로 오기 때문에 우리 학교 실무사님은 택배가 아니면 교사들에게 따로 알림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내려가 사물함을 열어보니, 6학년 제자 하은이에게서 온 손 편지가 놓여있었다.
뜯어보니 하은이가 직접 그린 호박머리의 여자 아이, 별, 하늘 그림이 한지 편지지 윗부분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그 옆에 캘라그라피 글씨체로 윤동주의 ‘호주머니’ 시도 적혀있다.
호주머니
윤동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편지 본문에는 중학생이 되어 바뀐 일상 이야기, 친구 사귄 이야기. 어려워진 공부 이야기. 6학년 때 했던 ‘시가 있는 목요일’ 수업 이야기, 그러다 요즘 읽고 있다는 시집 이야기까지.
‘하은이가 시를 이렇게 좋아하는 아이였나?’
2019년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5월 어느 날,
이젠 슬슬 ‘시가 있는 목요일’ 얘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얘들아, 선생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일주일에 한 번, 너희들과 시 공부를 하려고 해."
"네? 시요?"
생각했던 반응이다. 놀란 표정에서 무료한 표정까지.
아이들 반응에 눌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선생님이 들은 얘긴데, 수련회 가면 마지막 밤에 장기자랑 무대를 열잖아. 어떤 중학교 수련회에서 아이돌 노래 커버곡으로 장기자랑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와서 시 한 편을 외우고 들어갔대,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그 긴 시를! 그것도 수많은 아이들 앞에서 말이야! “
아이들의 긴 침묵. 곧 침묵을 뚫는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그 학생 제정신이에요?"
이번에도 시윤(가명)이다. 침묵이 술렁댐으로 바뀌었다. 나는 가까스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시를 다 외우고 나자 학생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줬대. 멋있지? 그런 화려한 무대를 뒤로 하고, 나직이 시 한 편을 외우고 들어올 수 있는 그 덤덤한 용기 말이야. 너희들은 어때?"
"아니요. 하나도 안 멋있는데요."
"선생님이 지어낸 얘기죠?"
아이들의 거친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스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여하튼 선생님은 다음 주부터 너희들과 시를 공부할 거야. 지금 나누어준 책에 있는 시들 가운데 한 편만 외워 와. 하고 싶은 아이들만 한다.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선생님도 외워 올 거야."
'과연 몇 명이나 외워올까? 5명만 넘어도 어찌어찌 이어갈 수 있을 텐데.'
다행히 여섯 명이 외워왔다. 대부분 짧은 시였지만, 그것도 어디랴? 마중물이 되어준 그 아이들 덕분에 그다음 주 '시가 있는 목요일' 수업이 이어질 수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는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참여했다.
그해 하은이는 한 해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시를 외워오지 않았다. 츄파춥스 사탕을 받는 것도, 스티커를 받는 것도, 시를 외워오는 아이들이 열일곱 명이 넘으면 학급 파티를 하겠다는 달콤한 구슬림도 하은이가 시를 외우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은이 가방과 호주머니에는 온갖 사탕, 젤리로 가득했다. 하은이는 모둠 활동을 할 때, 협조적이지 않은 남자아이들에게 사탕, 젤리로 참여를 설득했고, 그런 하은이 모둠은 늘 빼어난 결과를 냈다. 사탕, 젤리가 '갑북갑북'한 부자에게 나의 미끼가 통할 리가 있겠는가? 하은이는 다른 친구들이 앞에 나와 시를 외우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그 아이가 내게 보낸 편지에는 문학소녀처럼 '시' 이야기를 가득 써놓았다.
이 경험은 큰 깨달음을 주었다. 시를 외우지 않더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만큼 아이들에게 시가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6학년 담임이 되면, 새로 만난 아이들에게 시를 공부하자고, 시낭송을 하자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버겁다. 놀란 표정, 무관심한 표정, 때로는 냉소적인 표정까지 참아내야 한다. 그러나 올해 만나게 될 또 다른 하은이를 떠올리며 기꺼이 용기를 낸다.
"얘들아, 선생님이 할 얘기가 있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