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아이들과 함께 심은 감자 텃밭 상자가 사라졌다. 한참 만에 찾은 상자는 본관 출입구 옆, 학교 담벼락 밑에 놓여 있었다. 다른 빈 텃밭상자 세 개도 나란히 함께.
‘누가 옮겨다 놓은 걸까?’
같은 학년 선생님들께, 시설담당 주무관님께 여쭤봐도 모르신 댔다. 올해 옮긴 학교라, 전교 선생님들께 메신저를 뿌리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주인 없는 상자들을 정리한다 하셨는데, 내 것을 따로 구분해 놓으신 건가?'
'혹시 더 많은 아이들더러 보라고, 우리 반 텃밭 상자들을 본관 출입구 쪽에 갖다 놓은 건가?'
나란히 함께 놓인 빈 상자들까지 보니, 슬슬 시동이 걸린다.
‘그래, 이왕 시작한 거 본격적으로 한번 해보자!'
주말에 하남 하훼시장에 가서 부숙토, 계분을 잔뜩 사와 흙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심을 가지, 방울토마토, 땅콩, 옥수수, 토란, 오이 모종과 당근, 금잔화, 채송화 씨앗도 사다 놨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데, 교무부장님과 다른 부장님이 우리 반 텃밭 상자 근처를 기웃거리시는 게 보였다. 왠지 예감이 안 좋았다. 교무부장님은 급식실 옆 빈터에 우리 반 아이들과 감자 심겠다는 내 계획을 접게 하셨던 분.
궁금하신 분은 나의 이전 글 <학교텃밭투쟁기 1_학교 텃밭은 누구것일까?>를 읽어보시길 바란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우리 반 텃. 밭. 상. 자. 에? 무슨 일로?"
"선생님 반 꺼라고요? 저희들이 청소년단체 아이들과 하려고 며칠 전에 옮겨 놓은 건데요?"
아뿔싸. 이번에는 지고 싶지 않았다.
“지난주에 이미 우리 반 얘들이 씨감자를 심었는데요, 부장님이 옮기셨던 거예요?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찾았는데요.”
“감자를 심었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옮겼는데요. 다른 상자에 옮겨 심으세요. 오늘 흙 사다 주면 되죠?"
그 옆에 있던 다른 부장님까지 나를 무섭게 본다. 그분도 똑같이 말하셨다.
"우리가 얼마나 힘. 들. 게 옮겼는데요."
옮겨 VS 못 옮겨
얼마나 힘들게 옮겼는데 VS 그전에 우리 반이 먼저 감자를 심었다니깐
30분을 옥신각신.
그렇다면, 나의 비장의 무기. 또라이년으로 변신. 학교라는 조직사회에서 무탈하게 살아가기 위해 가끔 어쩔 수 없이 또라이년으로 변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부장님이 급식실 빈 터에 감자 심지 말라면서요. 그래서 상자텃밭에 심었더니, 다시 옮기라고요?
이곳에 저희 반과 1학년 다른 반이 감자 심는 거, 교장, 교감 선생님도 보셨어요. 부숙토, 지렁이흙, 계분 사다 배율 맞춰 흙 만들어놨더니, 어떤 흙을 사다 줄 건데요? 그대로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으면 옮기는 거 한번 생각은 해볼게요!”
내 얘기를 듣더니, 부장님이 별안간 갑자기 의견을 굽히셨다.
“네. 알겠어요. 그냥 선생님이 쓰세요. 감자 잘 키우세요. 곧 수업 시작인데, 빨리 들어가셔야죠."
맥이 풀렸다.
휴.
아무튼 다행이다.
사수했다.
돌아서 나오는데, 그때서야 내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또라이년은 끝까지 또라이년으로.
촌스럽게 가슴이 뛸 것은 또 뭐니.
그렇게 힘들게 사수한 감자가 이제 수확할 때를 기다리며 잎이 노랗게 변해가고 있다. 살짝 흙을 걷어내니, 제법 크게 자란 감자들이 파묻혀 있다. 손 한 뼘만 하던 옥수수는 몇 주 전 우리 반 아이들 키만큼 크더니, 이제는 내 키를 훌쩍 넘어섰다. 손 한 움큼 양이던 한련화는 팔 한가득 가득 피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나와 우리 반 아이들은 매일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텃밭을 돌보았다. 작은 세 개의 상자에는 다양한 작물들이 심겨져 있다.
이제 그곳은 모두의 텃밭 정원이 되었다.
고. 마. 운. 부장님들 덕분에 가장 많은 아이들이 드나드는 출입구 옆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1학년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학년 아이들까지 등하굣길 한참을 머물다 간다. 선생님, 학생뿐 아니라 학교를 위해 일하시는 돌봄 선생님들, 준비물실 실버 일자리 할머니들의 산책 장소까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