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와 동생은 여름이 되면 봉숭아 손톱 꽃물을 들였다. 우리 집 마당에는 화단이 없던지라, 봉숭아꽃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교회 화단이나 동네 공터에서 봉숭아 잎과 꽃을 꺾어오셔 우리들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주셨다. 어떤 해는 얻어오시지 못해, 봉숭아 꽃물들이기를 못한 적도 있었지만. 봉숭아는 내게 귀한 식물이었다.
올봄 옆반 샘이 각 반에 심을 꽃씨를 나누어주었다. 백일홍, 천일홍, 접시꽃, 채송화... 그리고 봉숭아꽃. 내심 반가웠다.
'우리 반 아이들과 꼭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지.'
봉숭아 씨 발아율은 정말 높았다. 큰 함지박두 개에 줄뿌림을 했는데, 새싹들이 빼곡히 자라나 계속 계속 솎아주기를 해야 했다. 뽑은 봉숭아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집에 가져가 공동육아 아마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밤에 몰래 아파트 화단에 심기도 했다.
여름방학을 한 주 앞두고, 우리 반 알뜰시장을 열었다. 물품을 준비해오지 못한 몇몇 아이들에게 봉숭아 꽃물들이기 서비스 가게를 함께 열면 어떻겠냐 제안을 했다. 나름 레트로 갬성 가게가 될 거라 확신하며...
그러나 아이들 반응은 단호했다.
"얘들이 안 좋아할걸요? 6학년 얘들은 그런 거 싫어해요. 작년에 해봤는데 손이 간질간질해서 다 빼버렸어요. 손에 그렇게 비닐을 씌우고 하교할 때까지 어떻게 견뎌요? 공부는 어떻게 해요?"
아, 그렇다. 이 아이들은 1학년 아닌, 6학년 아이들이다. 담임 샘이 하자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을 것이며, 밀어붙여 한들 강한 역풍이 불 게 분명했다. 바로 생각을 접었다.
봉숭아는 하루가 다르게 쭉쭉 키를 뻗어갔다. 그러다 함지박 흙의 영양분이 다한 건지, 줄기 색도 꽃 색도 옅어만 갔다. 녹색 줄기가 연둣빛이 되다 노란빛을 뛰기까지. 장마를 맞이하고는 그 흉물스러움이 정점에 달했다. 봉숭아를 정리하는 반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맞이한 개학날. 우리 반 텃밭에 이르니함지박 두 개를 차지하고 있는 봉숭아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열매들이 많이 달렸다. 인터넷 검색으로그건 열매가 아니라 '씨방'이라는것을 알았다. 하나를 따다가 손톱 끝으로 살짝 속을 열어보니,
까맣게 가득 들어있는 작은 꽃씨들.
'그래, 저 봉숭아로 채종 수업을 해보자.'
열흘 후,
"얘들아, 오늘 생태 수업 때는 채종을 할 거야. 사진에 이거, 열매 같은 이거 보이니? 봉숭아씨방이래."
아이들이 킥킥댔다. 친구들에게 '씨방', '씨방' 거리며교실 분위기가 점점왁자지껄해졌다. 교실 금지어와 비슷한 그 소리를내며 너도나도 호쾌함을 즐기는 듯.
밖으로 나가 씨방들을 따게 했다. 큰 종이컵 두 개에 가득 담긴 씨방들. 그리고 남자아이들을 시켜 봉숭아 줄기들을 다 뽑게 하고 함지박을 마.침.내. 깨끗이 정리했다. 교실로 들어와 세밀화 그리기를 하고, 글도 썼다. 아이들은 관찰한 내용을 쓰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씨방을 열어 씨앗들을 받았다.교실이 조용해졌다.
작업을 다 끝낸 승현이가 수북이 쌓인 빈 씨방 껍질들을 가져와 물었다.
"선생님, 이제 이것들은 어떻게 해요?"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동그래진 승현이 눈.
"예? 버리라고요?"
씨앗을 받으며, 생명의 엄숙함을 경험했을 그 아이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가늠이 갔지만, 별수 있나. 버리는 수밖에.
"이제 봉숭아는 제 역할을 다한 거야."
그동안생태 수업 시간에아이들은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작물들에게 물을 주고 열매를 수확했다. 생명의 에너지를 경험하는 시간들이었으리라.
반면 이번에는 달랐다. 말라가는 봉숭아가 더 마르기를 기다리고, 자식인 씨앗들을 발라내고, 소임을 다한 봉숭아를 과감하게 정리했다.똑같이 생명을 경험하는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고 변명한다.
내년에도 봉숭아를 심을 것이다. 채종을 쉽게경험하게해주는 친절한 식물, 봉숭아. 그러나 올해처럼 함지박에 심지는 않을 거다. 기름진 노지에 적은 양의 씨앗만 뿌려 짙붉은 꽃달린 짙푸른 줄기를 키워낼 것이며, 씨앗은 받되 생명이 남아있는 몸통에 손을 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꽃이 지고 줄기가 말라가며, 생명이 서서히 거두워지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