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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낀표 May 15. 2023

파리 라데펑쓰에서 느낀 여행의 이유

D+1 낯선 환경에서 감각을 벼리는 일

오전 10시쯤 파리에 도착한 우리 부부의 첫 행선지는 에펠탑도 아니고 개선문도 아닌, 라데펑쓰(La defense)에 있는 쇼핑몰이었다.

라데펑쓰는 파리의 계획도시로, 파리 도심의 규제로 인해 들어가지 못한 업무용 건물들이 모여있는 업무 지구이기도 하다. 즉, 회사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라데펑쓰의 쇼핑몰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기내식 말고는 제대로 먹은 게 없던 우리는 푸드코트로 향했지만 낯선 시스템에 방황했다. 쇼핑몰에는 점심시간에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흔히 말하는 파리지앵들이 아니었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일상복 차림의 직장인들이었다.


반면 우리의 차림새는 그야말로 여행자였다.

관광객도 아닌 여행자. 파리 바로 다음 행선지가 800km를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이었기 때문에 36리터짜리 배낭에 발목 높은 등산화를 신은, 그야말로 남루한 행색이았다.

우리는 일상을 살고 있는 직장인들 사이에 있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이방인이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었고, 프랑스어로 쓰인 메뉴는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관광지의 레스토랑 주문법은 유튜브로 공부하고 왔지만, 이런 일상적인 식당의 주문법은 따로 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고기가 먹고 싶어 고기 사진이 있는 식당 앞으로 향했다.

눈치를 보며 입구에 서 있자 직원이 우리에게 몇 명이서 왔는지를 물었고 자리로 안내해 줬다.

다행히 영어로 쓰인 메뉴판에서 스테이크를 찾아 주문했고, 식당 앞에 있던 사진과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이후로도 사소한 고민들이 이어졌다. 케첩은 담당 서버에게만 부탁해야 하는 걸까? 결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빌(영수증)을 달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던 행동들이 낯선 나라에서는 한없이 고민되는 문제들이 되었고, 우리의 눈치는 보다 예민해져야 했다.

우리 테이블 담당서버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려 케첩을 부탁하고,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사람들을 보고 계산대로 향했다.

여기 직장인들에게는 매일 먹는 점심식사 한 끼였겠지만, 우리에게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다로운 식사였다.




나에게는 이런 낯섦이 여행의 이유 중 한 가지이다.

관광지에 가서 유명한 것을 보는 것, 휴양지에서 호화롭게 쉬는 것도 물론 좋은 여행이겠지만, 나에게 그런 것들이 일시적인 쾌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나는 여행이 나에게 쾌락보다는 변화를 주길 기대한다.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그 변화 중 한 가지이다.


우리의 머리는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익숙한 일은 무의식적으로 처리하여 에너지 낭비를 최소화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한 일이 늘어나며 생각할 기회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거니깐, 별 생각 없이 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사고의 폭은 좁아진다.

하지만 생각은 근육과 같아서 쓰지 않으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낯선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것과 같다. 같은 행동이라도 낯선 환경에선 의식을 하게 되고, 우리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한다. 그리고 예민해진 감각은 평소에 안 하던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부부가 여행을 떠나온 이유도 바로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매일 같은 환경에서 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아프고, 변화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80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여행을 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며 낯선 환경에서 우리의 감각을 살리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길 기대하며.


파리에 도착하고 첫날, 라데펑쓰 쇼핑몰에서의 혼란스러웠던 식사는 우리의 결정이 꽤 괜찮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라데펑쓰에서 멀리 보이는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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