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독후감 19. 손가락보다는 달을, 떡보다는 제사를
나는 구원의 교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확실히 중요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은혜로 건져내신다는 소식. 그것을 빼놓고 복음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심스럽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지나치게 '반드시 확보해야 할 거점'처럼 여기며 그것을 선점하기 위해 돌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전 부흥회에 초빙된 부흥사들이 자주 묻던 질문이 있다. "당신은 천국 갈 확신이 있습니까?" 그때 지목받은 사람이 큰 소리로 "아멘!" 하지 못하면 신앙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공개적으로 면박을 받기도 했다. 요즘엔 그렇게까지 무지막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구원의 확신'을 신앙의 잣대로 삼곤 한다. 또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며 긴장감을 키우기도 한다.
이런 문화가 생겨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앙이 형식과 관습으로 굳어가던 시대에,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을 다시 복음의 핵심으로 돌리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 열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처방이 습관이 되면 병이 된다. 구원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 양 고착되면, 그 처음의 열정은 어느 사이에 불안을 먹고 사는 종교적 강박으로 변해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9)
선물을 받았으면서도 "정말 받은 게 맞나" "이거 정말 값진 것 맞나"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태도는 이상하다. 더구나 목소리의 크기나 감정의 강도로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은혜라기보다 시험에 가깝다. 선물을 준 사람 앞에서 "이것이 진짜 선물이 맞습니까?"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감사가 아니라 불신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확신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이 기준이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초조하게 점검하기보다, 지금 내가 어떤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구원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부모의 유산에만 관심 있는 자식처럼 보인다. 유산에 관심 없는 자식이 또 어디 있겠는가만,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한다면 관계가 뒤틀린다. "유산은 줄 거지? 확실히 줄 거지?"를 거듭 확인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것도 민망하다. 유산을 확실히 받는 것이 효도의 목적이 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그리고 그 거래 안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조용히 죽어간다.
구원은 출발점이지, 집착의 대상이 아니다. 근거이지, 거래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께 달린 일이지, 내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틀어쥐어야 할 보험이 아니다. 구원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완성이라면, 우리는 평생 출발선 앞에서만 서성이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반복해서 점검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 뜻을 따르려 애쓰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구원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는 방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려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중요하지 않은가? 아니다. 구원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것이 중요한 방식이 달라야 한다. 구원은 신앙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으로서 중요하다. 내가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확인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이 관계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버지가 이미 문을 열어두셨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비로소 문 앞에서 배회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함께 살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내가 할 일은 순종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원에 대한 집착에서 조금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속을 계산하는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걷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