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봄이 되면 텃밭에 꼭 뿌리는 씨앗이 있다. 아욱이다. 다른 채소와 달리 벌레도 많이 덤비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크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을뿐더러 순을 질러 따먹어도 금방 새순이 돋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아욱국이 가져오는 아스라한 추억의 맛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 부여에서 백마강을 끼고 살았다. 그때의 백마강은 나에게 드넓은 호수였고 바다였다. 해질 무렵 따끈한 강모래를 맨발로 밟으며 놀기도 하고 한 여름에는 친구들과 헤엄을 치던 곳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어른들은 거랭이로 강바닥을 긁어 손톱만 한 조개를 잡았다.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사라진 백마강 재첩이다.
할머니는 이 재첩을 한 바가지씩 넣고 된장을 풀어 아욱국을 끓여주셨다. 아욱이야 마당가 텃밭에 수북하니 아예 그것을 낫으로 베어왔다. 일 나간 아버지 대신 내가 하는 심부름이다. 다른 채소는 막무가내로 주무르면 안 되었지만 아욱만큼은 달랐다. 줄기에서 떼어낸 잎사귀들을 박박 문지르면 거품이 인다. 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장난치듯 주물러 놓은 아욱 잎은 할머니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 담아 된장국에 넣었다. 솥단지에서 김이 나고 재첩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면 할머니는 밀가루를 묽게 반죽하여 수제비를 떠 넣는다. 그 시절 재첩 아욱국은 그리운 고향의 맛이요 할머니가 떠오르는 추억의 맛이다.
금년 봄에도 텃밭에서 아욱이 무성하게 자랐다. 씨를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싹을 틔우더니 벌써 줄기를 세우고 키를 재며 경쟁하고 있다. 씨앗 한 봉지를 한 곳에 무더기로 뿌려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잘 먹지도 않는 저런 풀떼기를 왜 해마다 심느냐는 아내의 핀잔 때문에 넓은 곳에 마음 놓고 씨를 뿌리지 못한 결과다. 하지만 비좁은 곳에서 크는 아욱은 의외로 연하고 줄기까지 부드럽다. 조금만 더 있으면 줄기마다 하얀 꽃대를 만들 테니 지금이 수확하기 딱 맞다. 또 아욱은 밑 둥까지 베어주면 그 자리에서 새순이 금세 돋아나니 망설일 것도 없다.
아욱을 베어 놓으니 우리 내외가 다 감당하기 어렵다. 옆집과 앞집 채소밭을 둘러보니 아욱은 심지 않았다. 그 집들은 토박이 농사꾼이니 그러잖아도 초보농사꾼인 나의 선생님들이다. 이참에 매번 농사일을 물어본 답례라도 할 겸 아욱 다발을 집집마다 문 앞에 두고 왔다. 흔한 것이라도 이웃지간에 나눠 먹는 게 시골 인심이다. 한참 후에 보니 옆 집 할머니가 봄볕을 쪼이며 아욱 다발을 다듬고 있다. “아니 저 양반이 이제 농사꾼이 다 되었네”라며 나한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왕초보 텃밭 농부가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으니 아욱한테 절이라도 해야겠다.
우리 집 텃밭에 가끔 들르는 친구들이 우리 집 김치가 최고라며 ‘비결이 무엇이냐’고 한다. 직접 기른 배추로 담근 것뿐이요 별다른 양념을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감춰둔 비결이 있을 거라는 추궁에 두 며느리까지 ‘어머니가 해주시는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칭찬이 바로 양념이요 비결일 것이라고 했다.
가을 아욱국은 문 닫고 먹을 만큼 맛있다는 말이 있다. 아내한테 아욱국을 잘 끓인다고 칭찬을 계속 퍼부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혹시 어릴 때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아욱국 맛이 나지 있을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