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장맛비가 퍼붓는다. 이런 날 점심에는 사무실 근처 꽃 카페에서 들깨수제비라도 먹는 것이 좋을 듯싶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함께 간 일행은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냐고 한다. 국수호박이다.
국수호박은 대부분 노란 멜론처럼 생겼는데 이 집에 진열해 놓은 녀석은 짙은 초록색 바탕에 줄무늬가 있고 생김새는 럭비공 같다. 함께 간 지인은 저것이 무슨 호박이냐며 수박이라고 우긴다. 내가 웃으면서 재작년에 이 집에서 호박씨를 얻어 직접 키운 녀석이라 했더니 그제야 믿는 모양이다.
당진지역 토종이라는 이 국수호박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히 이집 안주인의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해마다 한 두 포기씩 심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토종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재배하여 최소한 삼십 년 이상 키워온 것이라야 한단다. 수박 같이 생긴 이 국수호박은 그분의 할머니 때부터 심어온 것이라니 햇수로는 토종이 되고도 넘친다. 그래서 더 반갑고 소중한 녀석이다.
국수호박이란 이름은 호박의 속살이 국수처럼 풀어진다고 해서 붙었다. 외국 사람한테는 스파게티 호박이라고 해야 금방 알아듣는다. 호박을 익혀 찬물에 식혔다 겉을 누르면 호박속이 국수처럼 나오는 데 이것을 조리하여 먹는 것이다. 특별한 맛은 없지만 아삭한 식감을 가지고 있다. 마치 어릴 때 먹었던 박속 맛과 비슷하다. 피부미용이나 다이어트에 좋고 불면증에도 효험이 있단다.
이 녀석은 심어보니 재배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다른 호박에 비해 싹을 틔우기도 어렵고 호박도 거의 열리지 않는다. 가을이 다 되어 거의 포기할 무렵이 되어야 마지못해 호박 한두 개를 내어준다. 맛이 달거나 특별하지도 않고 키우는 것도 어려우니 점차 사라져 갈게 뻔하다. 이처럼 경제적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주변에서 소중한 토종작물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최근 우리 식탁이 외래 품종과 유전자 변형 식품에 점령당하고 있다. 얼마 전에 단체급식 등에 많이 쓰이는 ‘돼지호박’이라고 불리는 주키니 호박이 유전자 변형문제 때문에 전량 회수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특정 채소가 전량 회수된 경우가 처음 있는 일이라서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최근에 종자 주권 문제가 대두되면서 토종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나 역시 우리 기후와 식생에 맞게 잘 토착되어 속을 편하게 해주는 토종식물에 관심이 간다. 그래 텃밭 농사를 지으며 콩이고 호박이고 토종씨앗이 있다면 꼭 얻어다 심고 본다.
올해 우리 집 텃밭에 국수 호박씨를 심었지만 싹을 틔우지 못했다. 다른 호박들은 벌써 줄기를 뻗고 꽃까지 피우는 데 국수호박을 심은 구덩이는 감감무소식이다. 너무 일찍 씨를 뿌려 냉해를 입었던지, 씨가 덜 여문 탓인지, 한 겨울에 영하의 추위를 맛보이지 않은 탓인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내 이야기를 들은 가게 주인이 얼른 뒷문을 열고 밭에 다녀 오더니 싹이 튼 국수 호박 모종 몇 개를 건네준다. 호박이 열리면 지난번처럼 한 덩어리만 여기에 가져다 놓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 금년에는 서두르지 않으마. 네가 잘 자라 여기에 다시 오게 되면 오늘 나와 눈을 마주친 국수 호박의 손자뻘일 것이다. 올 겨울에는 토종 국수호박 옆에 손자호박이 나란히 앉아 나를 반겨주는 흐뭇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