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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인 Aug 02. 2023

냉면 절단사건

  올여름은 유난히 덥다. 후텁지근한 데다 며칠째 먼 산이 뿌연 것을 보니 미세먼지까지 기승을 부린다. 시원한 냉면이나 먹으면 답답한 가슴이 뚫릴 것 같다.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좀 멀었지만 꽤 잘한다는 냉면집을 찾아갔다.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듯 대기표를 받아 들고 한참을 기다린 후 자리를 잡았다. 넓은 홀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아주머니가 빨리 주문하라고 재촉한다.  내가 물냉면을 먹는다고 하니 같이 간 동료가 “물 하나에 비빔 둘이요”하고 외쳤다.


  냉면이 나오자마자 그 아주머니가 물어볼 것도 없이 가지고 있던 가위로 면 다발을 싹둑 잘라주었다. 뜨거운 면수를 마시는 사이 나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다. 오늘 냉면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십자로 갈라진 면 다발을 보니 불현듯 오래전에 일어난 냉면 절단사건이 떠올랐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 우리 사무실의 책임자로 오셨다. 짜리몽땅한 체구에 배만 불뚝 나온 그 양반 별명은 자연스럽게 금복주였다. 첫 대면에 목소리가 하도 커서 바짝 긴장했는데 별명과는 다르게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했다. 술 대신 그 양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냉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에 이 근방에서 가장 잘하는 냉면집이 어딘지 가보자고 했다. 내가 평소에 자주 가던 원산면옥, 평양면옥, 함흥냉면집을 떠올리다 그분 고향이 평양이라는 귀띔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시내 중심가 극장 통에 있는 평양면옥으로 얼른 모시고 갔다.


  유명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른 저녁시간인데도 그 집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겨우 문 앞에 자리가 나서 앉으려 하니 좀 기다려 보자고 한다. 한참 후에 금복주는 주저 없이 맨 앞으로 가더니 주방 코앞에 자리를 잡았다. 냉면집에서는 주방 앞에 앉아야 제대로 된 면 맛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음식을 나르는 동안 면이 굳어져 풍미가 떨어진다는 얘기다. 순간 심상찮은 분위기에 바짝 긴장되었다.


  저녁식사에 달랑 냉면만 대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고기나 냉채 수육이라도 한 접시 주문하겠다고 하니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인다. 냉면만 네 그릇을 주문하라는 신호다. 사람이 셋인데 네 그릇이라니 당황스럽기는 동행한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누가 또 오시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메밀 면이 먹음직스럽게 담긴 시원한 물냉면이 나왔다. 동치미 무와 배를 썰어 넣은 고명 위로 초록색 오이와 편육이 얹혀 있고 살얼음 위에서 삶은 계란 반쪽이 활짝 웃고 있다. 종업원 아가씨가 가위를 들더니 거침없이 물냉면 한가운데를 동강내기 시작했다. 금복주는 화들짝 놀라면서 특유의 고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간나이. 그걸 자르면 무슨 맛이 간?.  이거는 자네나 먹고 다시 가져 오라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얼른 수습해야 했다. 잘린 거는 내가 먹겠다며 내 앞으로 당겼다. 금복주는 한 술 더 떴다.

  “쇳내 나는 냉면을 쳐 먹겠다는 거이가? 다시 가져오란 말이디요”

평소와는 달리 노기 어린 금복주의 목소리에는 북한식 억양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금복주는 이북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평양냉면이 바로 고향의 어머니 같은 데 어떻게 그것을 가위로 자를 수 있냐고 했다. 메밀 면을 이로 끊어먹는 묘미를 모르면 냉면 먹을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다. 면 사리를 추가해서 남은 육수에 넣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항상 본인은 두 그릇씩 시킨다고 한다.


  결국 나는 그 양반이 천천히 냉면 두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자세를 단정히 하고 냉면에 대한 철학과 예의에 대하여 엄숙한 강의를 들어야 했다. 그날 세 명이 냉면을 먹고 반납한 냉면까지 합쳐 다섯 그릇 값을 냈지만 하나도 아깝지는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지금까지 냉면을 가위로 잘라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냉면은 그야말로 한국적인 음식이다. 서양 어디에도 찬물이나 얼음에 국수를 넣어먹는 나라는 없다. 냉면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던 경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고기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내놓는 집도 꽤 많다.


  나도 맨숭맨숭하지만 왠지 자꾸 끌리는 동치미 육수 냉면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자주 가는 숯골냉면집 역시 6.25 전쟁통에 피난을 내려와서 냉면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그 집 냉면을 먹었을 때는 금강산 옥류관에서 먹던 냉면처럼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주 삶아놓은 물 같은 육수가 아무런 맛도 아니었고 뭔가 서운 한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한 옛사랑처럼 자꾸 그리워지는 그 집의 냉면 맛에 자꾸 끌린다.


  냉면의 면발도 지방에 따라 함흥 쪽에서는 그 지방에서 흔하게 나오는 감자로 아주 희고 가는 농마(녹말) 국수를 만들었고 평양이나 강원도 쪽에서는 메밀가루로 면을 뽑았다. 메밀면도 농마국수처럼 뽀얀 것이지만 풍미를 더하려고 메밀껍데기를 볶아서 섞다 보니 색이 진해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냉면이 추운 지방에서부터 시작된듯하나 남쪽의 진주에서도 풍류음식으로 자라 잡고 있었다. 그래서 진주의 냉면은 육전이 푸짐하게 올라가고 고명이 아주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고 원래 냉면은 술을 먹고 나서 속을 푸는 음식으로 먹었다고 한다. 속을 달래려면 간이 세거나 자극적이면 안 되었다. 싱거우면서도 시원하게 속을 달래주는 그런 냉면은 만들기도 어렵고 꽤 특별한 음식이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냉면을 먹는 날은 땡잡은 날이었다.


  이제 냉면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시사철 먹는 음식이 되었다. 누가 어디에 맛있다는 냉면집이 있다고 알려주면 근사한 식사를 얻어먹는 것보다 훨씬 고맙다. 어떤 맛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기 때문이다. 오늘 찾아간 집에서는 면을 가위로 절단 내는 바람에 당황스러운 맛부터 보아야 했다. 냉면을 다시 가져오라고 소리 지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면서 싹 뚝 잘린 메밀 면을 주섬주섬 입에 쑤셔 넣었다. 꼭 가위 맛이 나는 것 같다. 그래도 참고 먹다 보니 소문대로 냉면 맛은 기대 이상이다. 슴슴하여 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오래도록 개운한 여운이 남는다. 좋은 친구라도 만난 기분이다. 따끈한 면수도 일품이다. 다만 이 집은 가위를 들고 덤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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