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회인 Aug 22. 2024

그해 여름의 보길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친구네와 함께 하루 종일 걸려 해남 땅끝 마을에 도착한 후 다시 배를 타고 간 곳이 보길도였다. 처음 가보는 섬이었지만 무언가 보물이라도 숨겨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가득 설렜다.


  여름 방학이었지만 남쪽 바다 끝에 있는 외진 섬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주 멀리 왔다는 점 빼고는 보길도의 풍경은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여느 섬과 다름없이 낮은 집들이 바닷가를 따라 납작 엎드려 있었고 동네 강아지들은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가 꿈에 그리던 섬이 아니던가. 아는 분이 소개해 준 민박집에 짐을 풀자마자 아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을 향해 내달린다. 그때가 벌써 삼십 년 전이다. 


  섬에서의 첫날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낯선 반찬이 무지하게 짰고 비릿했던 기억이다. 생선회를 기대했는데 텁텁한 미역국만 나왔다. 민박집 안주인은 한 여름 더위에 근처 물고기가 전부 저 멀리 추자도 너머로 피서를 떠난 모양이라며 미안해한다. 저녁 식사 후에 작은 어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금방 어두워졌다. 건너 쪽으로 한참 가면 멋진 해변이 있단다. 


  예송리에 있는 몽돌해수욕장이다, 저녁 해변에 수없이 깔린 검은 몽돌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왔다 빠져나가면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한여름 밤의 해변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촤르륵 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몽돌해변은 온통 검정 색인가 싶은 데 먹구름 사이로 달빛을 쏟아지면 하얀 포말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바라보니 시간도 멈추어 있는 듯했다. 그 옛날 이곳에 유배 온 윤선도 같은 선비는 여기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히 보길도는 낮보다 밤이 더 운치 있다. 


  다음 날부터 이틀 내내 짓궂게도 비만 내렸다. 섬에 갇혔으니 특별히 갈 곳도 없다. 그만 쉬고 돌아가자는 친구의 말에 짐을 싸려는 데 민박집 주인아저씨가 찾아왔다. 생선 대접을 못해 미안하다며 내일 아침엔 하늘이 갠다니 고기를 건지러 가보자는 것이다. 요 앞바다에 그물을 쳐 놓았다는 것이다. 내심 회가 동했다. 그건 나보다 같이 간 친구가 더했다. 


  아침 일찍 셋이서 민박집 보트에 올랐다.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작은 보트는 마을 어귀를 벗어나 먼바다로 거침없이 질주했다. 한 참 가다 보니 소나기가 퍼붓고 거친 파도가 몰려와 배를 집어삼킬 기세다. 이러다 배가 뒤집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엔진만 꺼지지 않으면 된단다. 뱃사람 말을 믿어야지 별수 있겠냐며 뱃전을 잔뜩 움켜쥐고 있는데 기어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엔진이 푸드덕거리더니 꺼지고 만 것이다. 파도가 그렇게 무섭고 사나운 줄은 처음 알았다. 파도 밑으로 배가 뚝 덜어지면 양 옆으로 하늘대신 검푸른 물기둥 절벽만 보인다. 우리 셋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다. 뱃주인 얼굴을 쳐다보니 그도 하얗게 질려있다. 


  그 좌초된 배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양반은 갑자기 뱃머리에 우뚝 서더니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한 참 후에 그 험한 파도 속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깃배가 달려와 우리 보트를 예인해 주지 않았으면 나는 그때 보길도에서 영락없이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오후가 되자 배를 고쳤다며 다시 나가 보잔다. 밤새 내린 비에 엔진이 침수되었는데 이젠 괜찮단다. 친구 얼굴을 쳐다보니 아직도 멀미 때문에 어지럽다며 고개를 젓는다. 결국 쥔 양반과 나만 한 배를 탔다. 


  다행히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하였다. 민박집주인이 쳐놓은 그물에는 온갖 물고기가 하얗게 매달려 있었다. 물고기를 떼어 배에 담는 줄 알았는데 대부분 그냥 버린다. 생사를 같이 넘나든 나한테 줄 것은 따로 있단다. 복어다. 말 수가 적고 무뚝뚝하던 그 양반은 그제야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원 없이 실컷 먹어보란다. 내가 살아있는 복어를 바로 잡아 그것도 배 위에서 배 터지게 먹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한번 보았어도 평생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보길도 밤바다에서 보았던 몽돌해변이다, 한번 만났어도 평생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보길도 민박집 그 아저씨다. 한번 맛보아도 평생 잊지 못할 맛이 있다. 보길도 앞바다에서 죽다 살아나서 먹어본 복어 회다.

작가의 이전글 개복숭아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