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성적처리가 끝나고 이제 대학에 제출할 공식적인 서류제출은 ‘연말 정산신고서’한 건 만 남았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후 나는 어김없이 퇴임교수로 불려질 것이다. 퇴임 날이 가까워 오자 함께 식사하자는 요청이 여기저기서 들어왔다. 아직 2달이나 남았음을 핑계 삼아 미팅날짜를 길게 잡았다. 식사요청 건수의 반은 불발로 끝날 것이다.
퇴임 전 해야 할 것은 우선 연구실을 비우는 일이다. 옮겨야 할 짐 중 제일 많은 것이 역시 책이었다. 연구실을 가득 매웠든 책들 중 수백 권은 도서관에 기증했고, 또 다른 수백 권은 폐지등으로 편입되었다. 나중에 참고될 만한 책을 고르고 고른 것이 이 삼백 권이 되었다. 마침 출입구 공간의 대대적인 공사로 인해 책 20권 정도를 양쪽 손에 나누어 들고 시시 때때로 집으로 옮겼다. 책을 치우고 나니 연구실의 공간이 훤해졌다. 책을 옮기면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책을 보고 살아왔는데 아직도 남의 생각과 사상을 참고해야 할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신이 좀 처량하게 느껴졌다. 활자화된 대부분의 책을 뒤로하고 이제 나의 생각을 당당히 펼칠 수 있는 때가 되었노라고 할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무능감이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새로운 연결’이 있을 뿐이다.”
이런 말은 흔히 창의적 사고를 논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양손에 책을 들고 6층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서,
‘나의 교단생활은 얼마나 창의적이었나?’하는 상념이 일어났다.
‘나의 교직생활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생계유지의 수단 이외에 무엇을 덧붙여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봐도 딱히 ‘이거다’하는 것이 떠 오르지 않았다.
액자 등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폐기처분 한 후 옮길 것은 아담한 원목 책장이었다. 대충 짐작으로 아래층까지 옮기기만 하면 승용차로 실어 나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옮길 수 있는 날인 일요일을 택했다. 꽤 무거운 책장을 한 계단씩 내리기 시작했다. 6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데 족히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애써 내린 책장을 차에 실을 수 없었다. 2-3cm만 차 폭이 컸더라면, 아니면 책장이 조금만 작았더라면 차입에 성공했어리라.
나는 책장을 들어 즐비한 원룸들이 모여 있는 적당한 공간에 세워 두었다. 월요일에 스티커를 붙일 요량이었지만 내심 누군가가 그 책장을 보면 가져갈 것으로 기대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책장 옮기는 것에 실패하고 연구실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학내는 매우 조용했다. 간간이 학생들이 도서관과 기숙사를 왕래했지만 연구실 통로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예고된 한파의 전 날이라 그런지 창문 밖이 더 고즈넉해 보였다. 창문을 살포시 반쯤 열었다. 매서운 찬 기운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몇 개 월 전만 해도 이 연구실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 순간 만은 평화로움이 느껴졌지만 한창 입시시즌이라 자원충원에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교직원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함께 했다. 학령인구의 감소가 시작되면서부터 지방대학은 해마다 정원감축 및 미충원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지방대학의 운영체제는 대격변을 맞게 될 것이다. 어쩌랴!
“누구나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싫어 하지만 마땅히 그렇게 되었으면 이를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공자의 말씀이다. 교육환경 역시 이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내가 몸 담은 학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바라면서 지금은 이곳을 떠 날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다.
교직생활은 욕구를 생성시키고 , 변화시키고 , 생활패턴을 형성시켰다. 대여섯 가지의 생활 수칙에 담겨 있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하루 일과가 대체로 규칙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둘째, 생활의 목표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목표의식을 지닌 생활 – 그것이 나의 생활패턴으로 정리된다. 학교를 떠 난 이후에도 이런 패턴으로 생활하는 것이 좋을까? 약간의 변형이 나을까?
아니면 전면적 변화를 시도해 새로운 삶을 창출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유지해 온 생활의 전면적인 변화라면 이런 것이다. 하루 두 끼의 식사, 잠이 올 때까지 잠자지 않고 깰 때까지 잠자는 것이다. 시계를 멀리하고 달력의 요일을 변경해 생활하는 것이다. 새로운 연력을 만든다. 1년을 365일, 12 개월로 나누지 않고 24 절기로 나누어서 한 절기를 시작으로 1,2,3,4.....로 채우는 것이다. 365일을 절기 24로 나누면 1 절기는 15-6일쯤 될 것이다.
입춘에서 시작하여 1,2,3,4,5......... 15일
우수에서 시작하여 1,2,3,4,5,........ 15일
동지섣달이면 1년이 완성될 것이다. 새 연력에 따르면 3월 3일이 나에게는 입춘 15일이 될 것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사는 것이 된다. 단지 기존 달력과 다른 점은 ‘나 만의 방식’으로 생활해 간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1년을 절기에 맞추어 무언가를 계획하면 새로운 감각이 생길 것으로 느껴졌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의 국민들은 저녁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물론자인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먹는바 그것이 사람이다’라고 설파했다. 먹는 행위의 중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건강을 위해선 통상 아침은 먹어야 하고, 점심은 정승처럼, 저녁은 거지처럼 먹어라는 말도 있다. 아침에는 채소과일식, 점심은 일반식, 저녁은 먹지 않기로 계획해 본다.
새로운 달력에 , 가벼운 식사에 그러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목표 있는 생활’에 대한 것이다. 퇴임 후, 나는 어떤 목표를 갖고 싶은가? 오래전에 「인생상담실」을 운영하고 싶었다. 심리 및 생활 상담소를 개설할 수 있는 국가자격증을 수십 년 전에 마련한 터였다. 그러나 상담실 운영은 포기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나 자신도 잘 경영하지 못하면서 자격증이라는 허울을 쓰고 남의 아픔을 치유해 주겠다는 생각이 헛되여 보였다.
누군가 나를 심하게 곡해하여 험담과 비난을 전해 들으면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밝히려는 기질이 여전하다. 몇 달 전 이와 유사한 일이 생겼었다. 며칠을 두고 벼르다가 결국 당사자를 직접 부르고 사실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입회하에 일도양단하듯 따지고 캐묻고 역정을 내면서 소리쳤다. ‘사실’에 근거하여 논박했기 때문에 상대방은 할 말을 잃고 거듭 사과를 할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한 편으론 속이 후련했지만 또 다른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나이만 먹었지,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지 못했구나.’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조용하면서도 침착하게 해결하였더라면 상대방이 자신의 경솔함을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감화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말이다. 소리쳐 얘기한 탓에 그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에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때 했던 나의 성찰이 나를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 또한 사실이다.
퇴직 후의 계획 속에 「시간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단념했다. 평소에 나의 전공이 개설돼 있는 대학에서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라도 강의를 하고 싶었다. 「시간강사」 자리도 경쟁이 치열하다. 「시간강사」 자리를 얻지 못해 애태우는 많은 젊은 학도들을 생각해 보면 나의 희망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 자신이 독보적인 어떤 사상이나 재능이 있어서 그것을 청년세대에게 전파하고 싶다면 모를까, 그도 아닌 것이 지식을 요약 정리한 것을 가르치려 교단에 서는 것은 무리한 욕심으로 여겨졌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퇴임 후 무엇 보다 ‘건강’을 위해 힘쓸 것을 권유한다. 스트레칭, 산행, 탁구, 파크골프, 취미활동 등 많은 것들을 추천하면서 특별히 규칙적인 운동을 권유한다. 현대인들이 강조하는 노후의 건강관리에 대한 권고는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몇 개월 전 동갑내기 중학교 동기는 퇴사 후, 열심히 그리고 매우 규칙적으로 운동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소위 말하는 ‘운동과로사’였다.
나는 국궁을 배우기 위해 20여 년 전에 입문한 적이 있다. 국궁은 심신을 단련하는데 좋은 운동이거니와 시위를 당기는 폼이 멋있고 많이 걸어서 좋다. 무엇보다도 고도의 정신집중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 운동은 낮 시간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 조명시설을 갖춘 공터라 해도 활쏘기는 즐거움이 반감된다. 그러니 직장 근무를 하는 사람은 토, 일요일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한 두 번씩 빠지기 시작하면 시작 단계에서 벌써 맥이 풀린다. 몇 달 만에 한두 번씩 방문하니 다른 회원들 보기에 민망해서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두 곳의 수련장에 각각 대 여섯 번씩 몇 차례 다니다가 막을 내렸다. 활과 시위가 베란다 한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근교에 국궁장이 새로 들어섰다. 간혹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한 번 더 시도해 볼 까’하다가 좀처럼 발길이 향하지 못했다. 집에서 활시위를 당겨 보니 팔이 덜덜 떨리고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선호하는 운동 중 남은 것은 등산과 자전거 타기다. 언젠가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온 후로 산행의 기쁨을 알고 있다. 『옛산 옛절』이라는 오래전에 발간된 책 속에 있는 산이며 사찰들이 지금도 여전히 잘 보전되어 있는지 가 볼 요량이다. 그러나 높은 산은 오르지 않을 것이다.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는 산, 중간중간에 널따랗게 펼쳐진 평지를 ‘가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갈 수 있는 산행을 하고 싶다.
자전거를 승용차에 싣고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근교에 멈춘 다음, 자전거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면 그 시간만큼 마음이 상쾌한 적이 없다. ‘아! 도시 인근에 이런 곳도 있구나’할 감탄사가 나오는 풍광을 맛본다. 10여 년은 족히 방치되어 있었을 법한 수련원 같은 건물에 걸려있는 빛바랜 팻말, 허물어져가는 계단, 쓰다 버린 플라스틱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이 되려 안정감을 준다. 아마도 건물 앞에 여전히 싱싱한 은행나무며, 키 큰 단풍나무의 싱싱한 위광과 여름날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그 건물의 낡음을 감추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에 본격적으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진동자 훈련이다. 진동자 훈련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마음으로써 몸을 치료하는 초감각적 염파요법의 하위 수단이다. 진동자에 대한 관심은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명제의 진위여부를 확연히 체득하고 싶은 데에 기인한다. 진동자는 고리로 연결된 추가 달린 물건이다. 진동자는 염력으로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주역의 괘를 뽑는 것에 비견된다. 이순신 장군도 출전의 시각을 정하는데 주역의 괘를 활용했다는 설도 있다. 진동자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은 무한하다. 예컨대 어떤 일을 앞두고 성사여부를 가릴 수 있고, 어느 정도로 나타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 진동자를 통해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수칙이 있다.
첫째, 과한 욕심은 금물이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 많으면 진동자는 정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둘째, 꼭 필요한 일에 사용한다. 꼭 필요한 일이란 소중한 가치가 담겨있는 일이다. 타인이나 공공의 문제가 우선이며, 그다음이 자신의 문제이다.
셋째,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고도의 집중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어 5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지만 세 사람의 도움으로 세 명의 사람이 구사일생되었다. 매몰되어 아직 생존해 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지적하여 생명을 구한 이들은 대학교수, 고등학교 교사, 그리고 수녀였다. 국선도를 오랫동안 수행한 교수는 신문에 실린 사고 현장의 약도를 보고, 교사는 증산도 ‘태을주 수행’하는 중 알게 되었다고 했으며, 수녀는 진동자를 들고 사고 현장을 누비다가 특정한 장소를 찾았다. 일부 사람들은 진동자를 활용하여 수맥이나 광맥을 찾기도 하는데 고려수지침에서는 병처와 병의 경중을 발견하는데 활용한다.
진동자는 의식을 통한 무의식의 힘으로 작동한다. 진동자를 정확하게 작동시키려면 평소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4년 전 대선 당일 지상파 3사에서 오후 6시 정각 출구조사를 발표하기 수시간 전에 1위와 2위의 예상 득표율을 진동자로 확인했다. 확인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1위의 득표율은 40%를 넘는가?’
40%를 넘으면 원을 그리며 돌고, 40% 미만이면 일직선으로 왕래하라! 눈을 반개하고 진동자에 집중했다. 그런 다음,
41%, 42%, 43%, 44%, 45%를 적어 놓고 각각에 진동자를 올려놓고 똑 같이 물었다. 42%에서 원을 그리면서 진동자가 돌았고, 나머지는 일직선으로 왕래하다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2.1%, 42.3%, 42.6%,42.9%에 동일한 방식으로 물었다. 진동자는 역시 한 곳에서 큰 원형을 나타내었다. 득표율 2위인 경우에도 같은 방식으로 진동자에게 물었다. 오후 6시에 3방송사가 공동으로 출구조사한 내용과 진동자를 통해 얻은 결과에는 약간의 차이가 났다. 그러나 이튿날 최종결과는 나의 예측과 0.1%의 오차범위로 좁혀졌다.
나는 이 경험을 대선이 끝난 지 몇 주 후에 주변의 지인 소수에게 발설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신통해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그들은 내가 어림짐작으로 때린 것이 우연히 근사치에 가까웠다고 여겼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설령 그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방법을 물었더라도 알려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왜인가?
진동자의 사용에 대한 가치전제 없이는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행심을 부추기는데 이용될 수 있기에 그러하다. 이를테면 주역은 단순히 점치는 책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흥망성쇠를 보여 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처세를 하기를 권고하는 지혜서이다. 국난을 당하여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대승적 염원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주역을 통해 승리로 이끈 전투선의 출격 시점을 알 수 있었으리라 본다. 자리타리의 필요한 일을 하는데 활용되어야 한다.
진동자를 접한 것은 30여 년 전쯤이다. 무척 신기해서 평소에 알고 싶은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매우 정확한데 놀랐고, 한동안은 전혀 맞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당시 나는 깨달았다. 욕심으로 진동자를 들면 오답이 나오거나 무응답이 나온다는 것을. 한 번은 학내 문제로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Yes’와 ‘No’를 선택해야 할 긴박한 순간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윗 옷 주머니에 있던 진동자를 꺼내어 답을 구했다. ‘지금 계획하고자 하는 일이 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면 원형을, 그렇지 않으면 일자로 왕래하라!’고 명령했다. 진동자는 수십 초의 시간이 흐른 데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잠시 마음속으로 ‘자. 무심(無心)으로 돌아간다. 진동자여! 답하라.’고 했다. 그 순간 진동자는 일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확인한 후, 나는 바로 회의실에 들어가 상정된 안의 유보를 자신 있게 피력했다. 몇 개월 후, 당시에 하고자 했던 사업을 하지 않은 것이 큰 다행이었음이 밝혀졌다. 진동자의 정확성은 진동자를 드는 사람의 집중도에 비례한다. 진동자 수련은 집중력 수련이며. 곧 일심(一心)에 접속할 수 있는 수련이다. 심신일원의 정체를 맛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 의학의 고전이 제시하는 건강의 핵심은 ‘조화와 균형’이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안은 ‘균형 있는 식사’,‘소식’,‘걷기’가 그 토대다. 『히포크라테스 전집』과 『황제내경』에 의하면 공히 대부분의 인간은 완벽한 조화와 균형의 심신으로 태어났으나 인간 스스로가 병증을 불러오는 ‘과잉과 결핍’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건강과 질병은 생명고리의 연결선상에 있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과잉과 결핍’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의식 이외의 모든 것은 하향작용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즉 생겨나면 자라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그리고 멸하는 과정을 밟는다. 생명시스템이 작용하는 원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하고 안정된 건강의 방법을 희구해 마지않는다. 오직 하나, 인간의 의식은 상향과정을 지향할 수 있는 파워가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간절함은 생명의 시간을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의식이야말로 생명의학인 동시에 생명과학의 근간이다. 긍정적인 의식을 제대로 갖기 위한 정지작업은 ‘집중과 몰입’이다. 이를 위한 동서양의 현자들이 제시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나는 그중 아침에 ‘절’, 저녁에 ‘염불’을 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체투지의 절을 21번 혹은 108번을 하고, 저녁에는 다라니경, 나무아미타불, 광명진언을 봉송하기로 했다. 저녁이 잠들기 전 10분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으로 통하는 시간대이기에 고요한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염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오직 모를 뿐의 관(觀) 수행’이다. 관이란 내 마음속에 있는 생명의 원천인 또 하나의 마음이 있음을 믿고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시간이 허락하는 때에 수시로 자신에게 이를 일깨워 준다. ‘내 마음속의 순수의식, 너 만이 너를 증명할 수 있어!’하면서 말이다. 요한이 그랬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에서 “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체의 피조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요한의 마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일체 피조물이 아닌 것에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요한처럼 하고 싶다. 온몸으로 그것을 체득할 수 있다면 정년퇴임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대학교수가 아니다. 그 역할은 끝이 났다. 이제부터 나는 어떤 역할도 선택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오를 수 있다. 테니스나 탁구를 배울 수도 있다. 물론 요리를 배우고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 맹자의 말씀이다. 사람은 일정한 생활근거(직업 또는 노동)가 있어야 안정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의 조언에 의하면 나는 남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일 이외에 어떤 일을 선택할 것이다. 짧은 여행, 봉사활동, 텃밭 가꾸기, 독서, 사진 찍기 등 실로 다양 것들이 있다. 그 속에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최소한의 생활능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교직을 처음 시작 할 때 그 당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선생질이나 하지.’라는 정도로 교직생활의 경제상태는 널 푼수 없는 직업이었다. 맨 처음 부임한 중학교에서 처음 소개를 할 때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매력 없는 교직을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연금 수급자를 매우 부러워하고 있다. 처음 대학교원으로 진입했을 때 15평의 임대 아파트에 일곱 식구가 살았으니 경제형편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소득은 직장 다닐 대에 비해 반 이하로 감소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다양해졌다. 단순히 역할 선택뿐 아니라, 나 자신의 몸과 생각, 감정, 오감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머리를 기르는 행위, 또는 아예 스님처럼 삭발을 하며 대머리로 변신해 보는 것이다. 외출 시 넥타이 없는 개량 한복, 청바지 차림도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또는 사흘간, 일주일 간 혹은 21일 동안의 시간을 정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묵언의 기회도 가질 수 있으리라. TV로 ‘세계테마기행’이나 ‘영화’를 하루 종일 볼 수도 있고, 당분간 1 분도 보지 않을 수 있다. 한 가지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서 큰 기와집을 지을 수 있고, 멍 때리기 상태로 며칠을 보낼 수도 있다. TV를 안 보고, 두문불출하면서 멍 때리기를 하면 중학교 때부터 쓰든 안경도 벗어던질 수 있다.
실로 퇴임은 마음을 얽매이게 하는 일들을 하지 않을 자유를 나에게 큰 선물로 주고 있다. 정신수련의 공부가 깊어질수록 그에 상응하여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어떤 역할을 잘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푼다. 참된 존재에 가까이 갈수록 내 주변이 조금이라도 정화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리타리 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을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것이다. 수많은 임사체험(NDE ; Near Death Experence) 자가 증언하는 공통점은 저 세상은 빛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 했다. 또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며 공간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임사체험자의 결정적인 언사는 ‘이 세계는 하나(oneness)이며 모든 존재는 그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자각이야말로 인생의 가치를 논하는데 기본이 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심연의 순수의식과 접속한 순간의 상태를 초견성(初見性; 처음 성품을 알아차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학교수를 지낸 목회자는 37세 오전 9시 5분에 생각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런 이후 자신은 ‘내 안의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깊은 산속에서 보름 동안 먹고 자지도 않다가 심신이 한계점에 달한 순간 내기(內氣)가 폭발하여 참나를 증득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를 접하다 보면 수 십 년 전에 타계한 누나에 대한 상념이 일어난다. 누나와는 9살 차이가 난다. 누나는 처녀시절 어떤 노승의 말을 듣고 관세음보살 본심 미묘 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 반메훔’을 봉송했다. ‘옴마니 반메훔’을 열심히 낭송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누나는 골방에 들어앉아 염주를 돌리면서 ‘옴마니 반메훔’을 매우 빠른 속도로 낭송했다. 아마도 그다음 날 학교시험이 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오후 나는 집으로 돌아온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오늘도 ‘옴마니 반메훔’ 할 거요?”
누나는 이렇게 답했다.
“‘옴마니 반메훔’을 500번이나 열심히 외웠는데 시험을 망쳤어! 아무 효험이 없는 염불 따위는 앞으로 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지만 누나의 그런 말과 행동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고작 몇 십분 기도해 놓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누나의 그런 태도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소박한 심성에서 나온 것이라 본다. 어떤 다른 수단을 빌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겠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누나는 자신의 일생을 그 단순함과 소박함으로 보냈다. 아마도 그 단순함으로 인하여 견성을 증득한 사람 못지않은 공덕을 지었기에 좋은 곳에 갔을 것으로 믿는다.
참나를 증득했다든가 시간재단(時間裁斷;시간의 끊어짐)을 체험해서 자기 본성을 알았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자명한 일이다. 한편 영성에도 급이 있다는 것이 전통적 해석이다. 요한은 사랑의 10단계를, 화엄경에서는 보살도의 10등급을 언급한다. 견성 후 이에서 물러서지 않은 인간의 삶은 소박함 그 자체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의 환상에 젖지 않는다. 순진한 생각은 순수한 생각에 가깝다. 남의 말을 잘 믿고, 잘 믿은 나머지 손해를 보기도 한다. 손해를 보고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누나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원서접수를 맡겼다. 그런데 그 친구분은 누나의 부탁을 깜빡 잊고 접수 마감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 해 누나는 1차 대학 시험을 보지 못했다. 결국 2차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누나는 그 일에 대해 미안해하는 친구를 달래기에 바빴다.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70대 중반을 바라볼 나이다. 결혼 한 누나의 집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었다. 절간처럼 정결하기에 그지없었다. 8형제 중 장남과 결혼하여 고달픈 가운데서도 불평 없이 꿋꿋하게 생활을 영위했다. 고달픈 생활환경이 누나의 수련장이었을까? 채 50이 되기 2년 전부터 몸 여기저기에서 탈이 나더니 수술 후유증으로 응급실을 몇 차례 들락거리다 세상을 하직하였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누나의 모습은 차마 마주 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얼굴이 부을 수 있는 한계를 넘고 있었으며, 피부가 탱탱하다 못해 딱딱하면서 누런 빛을 띠고 있었다. 호박처럼 부어 오른 누나의 손을 부여잡자, 누나는 눈을 떠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누나의 눈에는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이 보였다. 삶의 겨울이 조금 일찍 찾아와 “괜찮아, 괜찮아, 나, 동면한다.”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병원응급실을 나온 지 일주일이 안 되어서 누나의 부음이 들려왔다.
‘겨우 나이 50에 생을 마감한 누나의 삶은 무엇이었든가?’
나는 당시 황망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나와 이 세상을 떠난 누나와는 큰 차이가 없다. 나와 누나는 거의 동일한 시간과 공간대에 살다 간 사람들뿐이라고. 미미한 차이로 누나는 숨을 쉬지 않고 나는 숨을 쉴 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다. 설령 삼천 년을 살고, 삼만 년을 산다 하더라도 영원이라는 개념하에서는 무시할만한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가 말이다. 누나가 세상을 떠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내면의 밀실에서 속삭이고 있는 말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순진하고 단순함은 이해관계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는다. 때론 남의 약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만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모함을 받기도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똑똑하길 바란다. 재능이 출중하기를 바란다. 재능이 뛰어나고 영리하면서 욕망이 많으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주변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겪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그 원인은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판단의 누적적 결과이다. 잘못된 판단의 기준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민감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둔감한 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취하고자 하고 남의 입장 이나 처지를 경시한다. 단기적인 일에 치중하고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을 애써 외면한다. 사물이나 인간관계 내지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잘못된 판단의 결정적 모습은 ‘진리가 밥 먹여주나?’이다. 그렇다. 진리 자체가 밥 먹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이고 가까이하려는 노력 가운데 만복이 깃든다. 인간 개개인의 생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각자의 출생배경 자체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절대적인 평등의 원리하에서 작동한다면 최소한 태어나는 환경에서부터 비슷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지혜가 동원되어야 한다. 운명(運命)은 잠재적 능력인 명을 잘 운전해 가는 것이다.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불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유행에 뒤처진 낡은 소형차를 긴요하게 잘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거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미래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하고 있는 일을 보라!’ 불경의 가르침이다. 인간의식의 최고 단계는 ‘하나 됨’으로 표현된다. ‘하나’에 임을 붙이면 ‘하나님’이 되고, ‘하나’에 마음을 붙이면 ‘일심(一心)이 된다. 하나님의 마음은 일심이며, 일심의 체는 하나님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 일심에는 형언할 수 없는 좋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욕망이 일심의 제어하에 있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를 희구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 한 곳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세상사 여러 면에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돈도, 권력과 지위도, 명예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그리고 건강도 그렇다.
그럼 공부는 어떨까? 어떤 공부를 하느냐가 중요하지만 공부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 신나게 하는 것은 좋으나 어떤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되어 목표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
‘거문고의 줄처럼 공부하라!’
부처님의 말씀이다.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아야 소리가 잘 나는 거문고처럼 적절한 긴장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매 순간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