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잠을 자면서 꿈을 꾼다. 어떤 이는 “나는 잠든 사이에 꿈을 꾸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꿈을 꾸지만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꿈꾸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꿈에 등장하는 것들은 대부분 낮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과거의 기억들과 뒤섞여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낮의 경험은 외부에서 관찰될 수 있는 모습뿐 아니라, 자신이 억눌렀던 생각이나 감정들을 통틀어서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잠을 자면서 뒤죽박죽 된 이상한 꿈을 꾸지 않고 안정되고 깊은 수면을 취하려면 낮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느낀 것들이 편안했어야 가능할 것이다.
“지난밤 꿈자리가 사나워!” 흔히 듣는 얘기다. “어젯밤 천연색 꿈을 꾸었어!” 가끔 듣는 말이다. “꿈속에서 수많은 고기들이 펄떡이는 푸른 바다를 보았어!” 어쩌다 듣는 소리다. 또 꿈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해몽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간 밤에 여러 마리의 돼지들이 득실대는 꿈을 꾸었는데 횡재할 일이 생긴다는 게 아닌가?”하고 말이다.
꿈은 사고팔기도 한다. 김유신의 누이가 언니의 꿈을 사서 태종 무열왕의 아내가 되었다는 얘기는 오랜 세월 동안 널리 우리에게 회자되어 온 설화다.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하여 정신생리적인 가설을 세워 현대 심리학의 큰 토대를 이루었다. 김만중이 남긴 『구운몽』 이나 이광수가 쓴 소설 『꿈』 은 ‘인간의 삶이 한낱 꿈같이 허망한 것이니 욕망에 사로잡혀 어리석게 살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루터 킹은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다. 또 ‘꿈은 이루어진다’라 한다. 이때의 꿈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려면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고, 절실해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한다.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이미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상상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라’라고 설파한다.
꿈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잠자는 사이에 꾸는 무의식의 세계인 꿈과 생시에 생각하는 의식의 꿈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의 꿈과 뒤의 꿈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꿈과 생시가 엄연히 다른 현상이라고 판단하듯 말이다. 너무나 명확하게 구분되는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과연 그럴까? 의식의 꿈과 잠을 자고 있을 때 꾸는 꿈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생의 1/3은 잠자는 시간이다. 잠자는 것은 숨을 쉬거나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단순하게 보면 낮은 의식의 세계요, 밤은 무의식의 세계다. 낮에 하는 활동들은 의식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며, 밤에 잠드는 시간은 무의식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밤에 침대에 누워 잠이 들자마자 의식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세계로 편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잠을 자면서 ‘내가 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무의식이 제공하는 필드에서 생시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으로 노닐 뿐이다. 잠들고 있을 때가 무의식의 세계라는 것은 잠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노닐던 꿈은 한순간에 훅 날아가 버린다.
우리의 낮과 밤의 시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번갈아 교차하는 시간들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근원은 순수의식이다. 우리는 눈뜨면 의식의 세계에 눈 감으면 무의식세계에 있으므로 의식과 무의식의 근원인 순수의식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칸트는 ‘물자체’라 명하여 ‘인식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잠자는 꿈을 통하여 그곳에 접근할 수 있다.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잠시나마 가능할까?
말하자면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전환되는 순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전환되는 찰나에 가능하다. 또 한 가지 꿈을 통해서 순수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 이는 꿈을 꿈인 줄 알아차리는 것이다. 무의식에서 펼쳐지는 이 꿈의 세계가 나의 순수의식이 만들어 낸 것임을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루시드 드림 : 자각몽 自覺夢’라 이름 붙인다. 루시드 드림이라는 말은 19세기 네덜란드인 한 의사에서 출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 및 티베트 밀교 등의 종교단체에서 앞날을 예측하는 ‘예지몽’의 수준이나 나아가 ‘꿈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로 진화되어 있다.
루시드 드림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루시드 드림이 ‘밤에 꾸는 꿈만 꿈이 아니라, 생시의 생활도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예비단계라는 점에 있다.
살아 있을 때 견성하고 바라밀을 수행하여 ‘정토 淨土’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몸(肉)을 갖고 있을 때 영성(靈性)으로 거듭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의 교설은 더 높은 차원의 지적들이다. 급한 대로 루시드 드림이나마 충실하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다면 이 자체만으로도 새 희망과 큰 힘이 되리라 본다. 실로 루시드 드림은 생시의 삶을 매우 유익하고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꿈속에 사는 자’에서 ‘꿈에서 깨어난 자’로서의 삶은 우리의 의식세계를 바로 세우는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요사이 평소와 다르게 누군가와 대화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 (1)
나 :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온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한정된 것입니다. 조언이나 권유 정도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절대 그대로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각자의 특수한 여건 속에서 창의적으로 응용하라는 겁니다.
학생들! 알겠습니까? ”
여러 꿈속의 장면에서 기억나는 대목은 이 한 가지였다.
꿈속 (2)
- 꿈속 (1)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
어떤 감독관 : “수업매체를 다양하게 활용하십시오.”
나 : 아니, 꿈속에서 까지 와서 수업방법을 지시하십니까?
꿈에서 깨어난 후, 즉각적으로 드는 생각은 ‘아, 무의식은 꿈이 꿈인 줄 알고 있구나. 이게 생시에도 적용되어야 할터인데.
꿈속 (3)
질문자 : “당신은 당신이 소망하는 데로 되기 어렵습니다.”
나 : “왜 그렇습니까?”
질문자 :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 : “때때로 자문자답 합니다.”
질문자 : “그게 뭡니까?”
나 : “청정한 마음에서 왜 업식이 만들어지는가?
이에 대한 답은 생각으로 알 수 없다.
신비 중의 신비이다.”
질문자 : “질문도 생각이요, 답변도 생각입니다.”
나 : “그럼 아무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질문자 : “당신 스스로 느껴보세요.”
나 : “아, 그렇군요. 생각과 감정이 ‘나’의 손님이란 말이군요.”
질문자 : “손님이라기보다 당신이 스스로 조작한 것입니다.”
나 : “그렇다면 당신과 얘기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들었단 말이지요.!”
질문자 : “나한테서 답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보시라니까요.”
나 : “아, 이게........”
꿈에서 본 장면은 몇 년 전에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내가 모 선지식과 나눈 질의응답의 연장이었다.
꿈속 (4)
친구 : “요즘 어떻게 지내냐?”
나 : “이것저것 하면서 그럭저럭 지내.”
친구 : “일전에 네가 말했던 ‘반야심경’을 붓글씨로 사경 하는 것은 잘 되고 있냐?”
나 : “한 동안 부지런히 하다가 지금은 때때로 해.”
친구 : “야! 너는 네가 한 말도 지키지 않는구나.”
나 :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친구 : “무슨 일을 하건 일정한 성과가 날 때까지 하라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냐?”
나 : “응, 그랬었지.”
친구 : “그럼 뭐라도 성과가 있는 거니?”
나 : “잘 모르겠어.”
친구 ; “바라밀 어쩌고 하더니만 게을러터졌구나.”
친구는 좀 격앙된 어조로 나에게 다구 쳤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만 꿈이 아니라, 관찰되는 모든 것은 꿈과 같다.’라는 생각과 느낌이 동시에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