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자바는 출근 시간 이 분을 남겨두고 서둘러 자기 자리에 와 앉았다. 숨을 몰아쉬는 자바를 바라보며 도리 선배가 답답한 듯 숨을 길게 내쉰다. ……쓴웃음을 짓는 도리 선배는 오늘 제대로 한 방 먹일 작정인 것 같다.
“야, 이자바.”
“……네.”
“이전에도 계속 얘기했었지만 말야.”
“…….”
“네가 그렇게 우리보다 늦게 온다는 게 무슨 뜻인 거 같냐?”
초거가 끼어든다.
“우릴 엿먹이겠다는 거.”
“죄송합니다.”
“난 저 새끼 카톡방에서 나갈 때부터 재수가 없었어.”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고.”
“…….”
“내 일이나 끝내면 된다는 식으로 일하는 그 태도가 말이야…… 나는 사실 기분이 좀 뭐 같아서 말이야.”
“…….”
“나는 말야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면…… 침묵하는 사람이야. 그들의 마음은 알 수가 없거든. 욕이라도 하고 화라도 내면 덜 불안하지…… 근데 말을 안 하는 인간들은 그 속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야…… 초거대리.”
“네.”
“그런 인간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들이라고.”
“맞습니다. 선배님.”
“본인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는 인간은 바로 저 새끼라는 거거든. 맞지 이자바?”
자바는 언제나 그렇듯이 실실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다. 도리 선배는 아내와 싸움을 한판 했거나 과장에게 결재받아야 할 보고서의 중압감에 눌리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출근하자마자 사장실에 불려간 과장이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도리 선배의 잇몸 운동은 계속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상큼한 자몽향을 주변에 흩날리며 주비서가 영업 일팀에 등장한다. 과장 책상에 서류 뭉치를 올려놓고 돌아가려는 주비서를 도리 선배가 부른다.
“주비서님.”
“네?”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가요?”
“나보다 한참 어린 새끼가 매일 저한테 엿을 먹이는데 말이죠. 뭐 방도가 있을까요.”
“요즘 애들이 좀 무서워서…….”
“참…….”
“맛있게 드시면 되겠네. 엿 정도야…….”
“뭐 다른 것도 먹이나봐요. 그쪽은?”
“아, 다른 팀에…….”
“뭐가, 뭐가?”
“복사기 쓸 때 종이 좀 아껴서 쓰라고 했더니.”
“하…….”
“당신이 사장이라도 되냐고 되려 화를 내더라고요.”
“주비서한테?”
“그렇대도요. 아직 일 년도 안 된 인간이…….”
“아이구야…….”
“머리에 똥싸고 가는 놈도 있으니까 즐겁게 엿 드세요.”
“어떻게 싸냐 머리에.”
“이렇게? 이렇게?”
초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바 뒤로 다가간다. 엉덩이를 자바의 머리에 가까이 가져가며 똥을 싸는 듯한 포즈로 힘을 주는 척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초거. 그 모습을 보고 도리 선배, 주비서, 초거가 함께 낄낄거린다. 미리도 나도 웃는다. 자바도 실실 웃는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자바를 가운데 놓아두고 점심 전의 허기를 달랜다.
자바의 출근 시간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자바의 외모, 행동, 말투, 습관으로까지 이어진다. 자바는 커피를 내리러 탕비실에도 가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다. 주비서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초거가 담배를 피러 사무실을 나간 후에도 도리 선배의 잇몸 운동은 끝나지 않는다. 열한 시쯤 과장이 사무실로 돌아왔고 도리 선배는 입을 닫았다.
과장은 무슨 소리를 또 듣고 온 것인지 심각한 얼굴로 무게를 잡았다. 질식할 것 같은 사무실 안. 다들 벙어리처럼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맞은편 자바의 책상이 힐끗 눈에 들어왔다. ……! 붉은 뭔가가 자바의 책상에 떨어져 있었다. 자바가 볼펜 끝으로 자신의 엄지 중간을 찍어버린 듯했고 엄지 손에서 흘러내린 피가 마우스 패드 근처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자바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니터만 보고 있다. 나만 그것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간다.
……별 것 아니게 보이는 쨉을 여러 번 맞으면 언젠가는 치명상이 올 때가 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기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만 좀 더 배운 사람들은 사람의 인격을 말로 죽인다. 언어를, 혀를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말로 그 사람의 영혼에 덫을 놓을 수 있다. 덫에 걸린 사람은 피를 흘리며 소리 없이 천천히 죽어간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얼마든지 즐기면서 마음껏 죄책감 없이 할 수 있다. 구경꾼이 있으면 더 재미가 붙는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본성과 너무 잘 맞는 놀이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고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할 수 있고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으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뱉어낸 수많은 말들은 서로의 영혼 속에 유리 조각처럼 깊이 박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니터 앞에서 남몰래 보이지 않는 피를 흘린다. 자바는 최소한 도리 선배, 초거, 나 같은 인간보다는 순수하고 심약한 인간이다. ……자바의 마음 상태는 이미 걸레 조각이 된 것 같았다.
열한 시 오십 분. 삼십 분째 미동도 없이 얼어붙어 있는 미리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맞은편 왼쪽에 미리가 앉아 있기 때문에 미리의 창백한 얼굴이 누구보다 내게 더 잘 보였다. 갑자기 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급히 뛰쳐나갔다. 화장실로 가는 듯했다. 미리의 뒷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나도 미리를 따라 일어섰다.
화장실에 도착해서 보니 역시나 미리가 화장실 세면대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배를 손으로 움켜쥔 채 미리의 얼굴은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미리를 붙잡았다.
“괜찮아?”
“…….”
“대체 얼마나 참은 거야? 응?”
“…….”
자신을 도와주려는 나를 보고도 미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리는 내 손을 뿌리치며 세면대를 붙잡고 스스로 일어섰다. 나는 미리의 모습을 그저 보고 있어야만 했다.
미리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자신의 폰으로 일일구에 직접 전화해 구급차를 불렀다. 십 여분도 안되 구급대원들이 십사 층 여자 화장실에 도착했다. 미리는 구급대원에게 초거를 놔두고 친동생을 보호자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미리는 그렇게 운반 침대에 실려 나갔다.
초거, 도리 선배, 과장, 자바, 나…… 우리 모두 미리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미리는 두 눈을 꼭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실려 가는 미리의 모습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얼마 전, 같이 점심을 먹고 나오며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좀 내달라고 했던 미리의 얼굴과 방금 전, 화장실에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미리의 얼굴이 겹쳐져 떠올랐다. 한동안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 멍하니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비상구 쪽에 서 있는 도리 선배와 초거가 보였다. 도리 선배와 초거는 내가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같이 안 가봐도 돼?”
“연락오겠죠.”
“유산되면 어쩌려고.”
“알게 뭐예요.”
“야…….”
“제가 뭘요. 결혼하겠다고 했으면 된 거지.”
“…….”
“그보다.”
“왜?”
“정신이…….”
“정신이가 왜?”
“정신이 걔가 미리한테 뭐라고 한 것 같아요.”
“……그래? 여자끼리 할 말이 왜 없겠어.”
“정신이 걔 우리한테 웃고 말하는 게 다 가식 같지 않아요?”
“……너도 느꼈냐?”
“선배도 조심해요. 뒤통수 때려 맞기 전에.”
“능력 좋으니까 여기서 끝까지 섞으라 그래. 과장도 은근 믿는 눈친 것 같던데…….”
“과장이랑 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둘이 뭔 사이인지…….”
“……잤을까요?”
“모르지.”
“무서운 년.”
나를 중간에 놓고 둘은 둘도 없는 동료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자리에 돌아와 앉은 뒤, 몇 분 후에 초거와 도리 선배도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뒤 카톡이 울렸다. 초거와 도리 선배, 내가 함께 들어가 있는 단체 카톡방이었다. 초거가 물었다. 점심 뭐 먹을까요? 도리 선배가 답했다. 오랜만에 정신이 먹고 싶은 거 먹자. 나는 오늘은 위가 좋지 않아 사무실에 남아 있겠다고 죄송하지만 두 분이서 드시라고 톡을 남겼다.
도리 선배, 초거, 나는 동료로 칠 년을 함께 지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보다 더 아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오늘 나는 확인했을 뿐이다.
점심시간이 반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밖엔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초거가 비를 보며 한마디 한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곧 퍼부을 듯한데 다들 나갈 때 우산 꼭 챙기십쇼.”
도리 선배가 초거에게 남은 우산이 있냐고 물었고 초거는 미리 책상 위에 있던 연보라색 접이식 우산을 도리 선배에게 건네주었다. 도리 선배는 우산을 받아들고는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초거와 도리 선배, 과장이 우산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선다.
사무실 안에는 자바와 나, 둘 뿐이다. 뜨거운 블랙티를 탕비실에서 타온 후 자리에 앉았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창문 위로 빗방울이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세찬 빗발 소리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다.
내가 좋아하는 빗소리…… 그 사이로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자바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이곳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면서 견디고 있는 이유는 너희에게 내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뿐이다. 그것은 너희를 배려해서가 아니란 얘기다.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소중히 여기는 그 어떤 가치에도 동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가치라는 것은 너희 스스로도 그것이 왜 가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인데 너희는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독립적인 존재이고 그것이 너희는 미운 것이다. 나는 너희처럼 누구를 희생시키면서 나를 유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와는 닮지 않은 내가 그저 미울 뿐인 것이다. 너희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너희 스스로 눈을 멀게 해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깨어날 수 없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너희는 어둠 속에서 너희의 비뚤어진 욕구에 충성하며 너희가 정한 너희의 운명대로 죽어갈 것이다……. 너희가 옳다고 여기는 그것이 너희를 외롭게 하고 병들게 할 것이다. 너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곳으로 너희를 데려갈 것이다. 너희에겐 진실을 마주할 능력이 없으며 너희가 너희 자신을 속인 그 방식대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너희 안에 있는 두려움이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연합될 수 없으며 영원한 남으로 남을 것이다……. 너희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없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너희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자바의 말들이 내게 아프게 파고들었다. 자바의 눈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흘러내린 것도 같았다. 잔을 들어 블랙티를 한 모금 넘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요일. 여느 날과 다름이 없는 하루였다.
단지 조금 놀라웠던 점이 있다면 자바가 일찍 출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자바는 영업 일팀에서 제일 빨리 출근한 나보다 먼저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자바는 출근한 나를 보더니 귀에 꽂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빼고 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출근한 도리 선배도 내심 놀란 눈치였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켜면서 계속 자바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과장이 올 때까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는 자바를 보며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가슴에 돌덩어리가 들어앉아 있는 느낌이 지속되었다. 옥망 여사가 내게 보여준 사진에 관해 선배에게 꼭 알려야만 했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을 듯했다. 오늘 반드시 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오전부터 선배와 대화를 하려고 기회를 만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늦은 오후. 때마침 회의실에 혼자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선배를 보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선배는 회의실로 들어오는 날 보고도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선배 옆으로 걸어가 입을 열었다.
“선배 얘기 좀 해요.”
“…….”
“잠깐이면 돼요.”
“…….”
“선배…….”
천천히 눈을 돌려 나를 보는 선배. 제발 자신을 방해하지 말고 그냥 사라져 주면 안 되겠냐는 눈빛이다. 선배의 행동, 눈빛 하나에 심장이 베이는 듯하다.
“할 말이 없는데 난.”
“그런 게 아니라…….”
“…….”
“선배는 지금…….”
“…….”
“감시당하고 있어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폰을 책상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선배 사진.”
선배는 사진을 확인도 하지 않고 다시 모니터로 얼굴을 돌린다.
“알고 있어.”
“네? 대체…… G 사 관계자와 왜 만난거예요?”
“그 사람이 G 사였나?”
“……!”
“내가 만났던 그 사람이 G 사였는지도 나는 알지 못해.”
“…….”
“이곳에서 날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누군가가 내게 접근하라고 시킨 것일 테고…… 몰래 사진을 찍은 후 그것이 과장 손에 들어간 것이겠지. 아마 사장에게도 보고가 되었을 거고.”
“당신은 의심을 받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조용히 나가게 되면 다행이고.”
“……선배.”
“…….”
“무슨 생각인 거예요. 대체.”
선배가 모니터에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피곤함에 굳어져 있는 얼굴은 그 어떤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하는 기업이 구지 N 국에 법인을 세우는 이유가 뭘까? 지리적으로 가깝고 우리 제품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이 넘쳐나는 B, E 국을 남겨두고 말이야…….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 없어?”
“…….”
“여긴 정치계 큰손들의 배를 채워주는 공장일 뿐이라고. 이곳 사장은 그들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게…… 뭐가요?”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잖아. 아무리 정경유착이 상식이 된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 기업이 어떤 신념을 갖고 이곳에 빨대를 꽂고 있는지는 세상에 알려야 하지 않겠어. 시민들이 불쌍하잖아. 자신들의 돈이 지금 어떤 곳으로 흘러가는지는 알고 살아야지.”
“선배…….”
“아,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
“적어도 너는 네가 이곳에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거니까.”
내가 십여 년이 넘도록 알고 지냈던 사람이 맞는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선배의 얼굴이었다. 내가 선배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내 맘대로 만들고 조작한 환상인지도 모른다. 선배를 정말 안다는 것은 내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그는 과거에도 지금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툭. 마음속에서 겨우 매달려 있던 수천 개의 끈들이 한 번에 끊어졌다.
“뭐하는 짓이야!”
“당장 경찰 불러요!”
“아아아악!”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회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몇 미터 앞에서 자바가 손에 든 뭔가를 공중에서 휘두르고 있었다. ……불이었다. 큰 쇠몽둥이에 천 조각을 매달아 그곳에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소름 돋게 웃고 있는 자바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윤익 선배가 참지 못하고 자바 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선배의 옷깃을 붙잡았다. 위험하니 경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윤익 선배는 저런 인간은 일도 아니니 상관 말라며 내 손을 뿌리치고 자바에게 다가갔다. 자바가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윤익 선배를 향해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가까이 오지마!”
“이자바.”
“가까이 오지 말랬다!”
“왜 그러는 건데.”
“죽고 싶어? 어디 다 같이 한 번 죽어 보자는 거야?”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다가오는 선배를 보며 자바가 방망이를 휘두르며 극도로 불안해했다. 순간이었다. 윤익 선배를 향해 돌진하는 자바. 자바가 윤익 선배의 복부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윤익 선배가 뒤로 넘어갔고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자바가 분노에 몸을 부들대며 씩씩거렸다. 잠시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던 자바가 기어이 발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후 윤익 선배의 얼굴에 발길질을 해댔다. 윤익 선배는 얼굴에 대여섯 번의 가격을 당한 후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자바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 보였다. 쓰러진 선배를 보고 흥분한 자바가 소리를 지르며 벽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상문 쪽으로 뛰어갔다. 자바는 사무실 안을 날뛰고 다니며 책상과 서류들 곳곳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책상에 순식간에 불이 불었다. 맹렬한 불길은 천장까지 치솟아 올랐다. 자바가 불방망이를 내버리고 괴성을 지르며 비상구 쪽으로 달려갔다. 백여 명의 탈출하는 사람들 사이로 자바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사람 중에 그 어떤 이도 쓰러진 선배를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긴급히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점점 호흡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나는 쓰러진 선배를 비상구 쪽으로 끌고 갔다. 선배를 뒤에서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갔다. 선배의 엉덩이와 다리가 계단 위에 질질 끌렸다.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하오 아저씨였다. 하오 아저씨가 선배를 등에 엎어 올리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계단에 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찼다. 의식이 흐릿해졌다. 계단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섰다. 비상구 앞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휴지를 한 뭉치 뽑아내 물을 묻힌 후 코에 갖다 대었다. 짙은 연기가 화장실 안으로 진군해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무릎에 묻고 숨만 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와 내 앞에 멈춰 선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린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싼티, 그녀가 서 있었다. 개구쟁이 아이 같은 싼티의 얼굴. 싼티가 나의 팔을 잡아당긴다. 무슨 힘이 남아 있었던 건지 나는 싼티의 손을 세게 뿌리친다. 몸이 바닥으로 점점 기울어진다.
“나 괜찮으니까…….”
“…….”
“가 봐.”
“…….”
“가라고…….”
“……일어나.”
“제발.”
“…….”
“나.”
“…….”
“있잖아.”
“…….”
“이제는…….”
“…….”
“쉬고 싶어.”
“…….”
“나 이제 그만 쉬고 싶어…….”
아파트 숲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작고 허름했던 유치원.
그곳에 오직 연두색 크레파스로만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유치원 아이들은 모두 그 애를 연두라고 불렀다. 연두가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의 외동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키 큰 나무들 속에 휘감겨 있던 연두네 집. 그 집 마당에는 고양이들이 늘 나른하게 걸어 다녔다.
그때 나의 엄마는 낯선 남자를 따라 자주 집을 비웠다. 나는 유치원이 끝나도 갈 곳이 없었다. 빛에 이끌리듯 내 발걸음은 연두네 집으로 향했다.
연두네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관문을 하나 지나야 했는데 그것은 연두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야채를 파는 노파였다. 연두네 집 고양이를 자기가 키운 고양이라고, 거짓말을 해대는 노파를 연두네 집 사람들은 그저 불쌍하다고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나를 삼킬 듯 노려보며 혼잣말을 하는 노파 앞을 후다닥 지나치면 마침내 연두네 집이 나왔다.
연두는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나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대문을 열어 주었다. 연두네 집 정원에 들어서면 폐 속까지 스며드는 향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것은 나무 그늘에서 나는 향이었다. 열매가 햇살에 빛날 때 나는 향이었다. 나무 깊은 곳에서 흐르는 비밀스런 수액 같은 향이었다. 그런 향들이 뒤섞여 나는 연두네 집 정원이 내게는 유치원보다 더 재미난 곳이었다.
연두네 집에는 연두와 나의 비밀 아지트도 있었는데 그것은 연두네 집 뒷마당에 있는 풀장이었다. 홀딱 벗은 채로 우리는 낮이고 밤이고 항상 그곳에 있었다. 낮에는 나뭇잎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수면 위로 비춰보았고 밤에는 달과 별빛의 속삭임이 하늘에서 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은 더없이 좋았다. 비가 내리면 세상에는 없는 나무와 비, 구름과 바람의 합주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풀장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 나무 잎사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귓가를 적시는 음악이었다. 그 어떤 화음도 연두네 집에서 듣는 소리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평생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음악이었다는 것을.
연두의 생일날. 연두가 가장 받고 싶어 했던 선물은 내가 그린 연두색 그림이었다. 연두네 집 세 마리 고양이 무지, 막지, 미지의 자는 모습을 대충 그려 건네준 선물을 연두는 너무나 좋아했다. 케익 대신 초콜릿만 잔뜩 사서 작은 동산을 만들어놓고 우리는 각자 소원을 빌었다. 나는 연두의 소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뚱뚱한 파인애플이 되는 것. 너무 말랐던 연두였기에 유치원 선생님들은 항상 연두를 걱정했다. 그래서 연두는 항상 뚱뚱한 파인애플이 되겠다고 입에 달고 다녔다. 나 역시 소원을 빌었다.
“뭐라고 빌었어?”
“말 안할래. 나중에 말할래.”
“나중에 진짜 말해줄거지?”
“응.”
“약속했다.”
“약속.”
“꼭.”
“꼭!”
나의 소원을 연두에게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나는 연두가 되고 싶다고 빌었기 때문이었다. 연두는 항상 아이들에게 이상한 아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연두는 분명 이상한 아이가 맞았다. 길에 떨어진 죽어버린 꽃들과 대화를 하겠다며 길에서 무릎을 꿇은 채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런 자세로 몇십 분을 멈춰 있는 아이를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연두가 좋았다. 스스로 세상 밖으로 밀려나겠다고 다짐한 듯한 별종. 그런 별종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 좋았다. 연두는 내게 사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꽃이었다. 가시를 품에 넣고 아픔이 일상이 되어도 그 상처에서 오히려 향기로운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문득 길을 걷다 앞서가는 연두를 바라보면 연두는 투명한 햇살 속에 조용히 담겨져 웃고 있었다. 눈부신 나무처럼 근접할 수도 없는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아이. 연두.
그 누구도 연두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연두의 아름다움에 들러붙어 겨우 연명하고 있는 벌레였다. 연두는 내가 자신에게 붙어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동화책에서나 봤던 구슬 거울, 종이 인형, 무지개 사탕, 꽃 지갑, 유리 반지…… 연두는 자신의 것을 내게 서슴없이 건네주곤 했다. 어디 그뿐이었나. 무지, 막지, 미지는 나와 연두를 지켜주는 수호대였다. ……연두와 고양이가 있는 그곳이 나에게는 집보다 안전했다.
그러나 그렇게 눈부셨던 날이 길지는 않았다.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집에 일찍 돌아온 엄마가 술에 취해 내게 울면서 애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죽어가는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을 무작정 나와 길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연두네 집까지 갔지만,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돌아섰다. 대신 야채를 파는 그 노파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노파에게 엄마 얘길 어렵게 꺼냈고 노파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대가를 지불하기만 하면 엄마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나는 연두네 집 풀장 안에 뾰족한 유리 조각을 깔아놓았다. 연두를 유인해 그곳을 지나다니게 했다. 풀장 물이 불그스름해졌고 연두는 힘들어하며 더이상 물속에 있지 못했다. 말없이 풀장 밖으로 나와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연두. 연두의 발에서 붉은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연두는 울지 않았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연두를 붙잡고 사실대로 얘기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남기면 엄마가 살 수 있다고 했다고, 그 이상한 노인네가 내게 그랬다고…… 그러나 연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엄마는 다행히 죽지 않았다. 대신 나는 벌을 받았는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연두를 볼 수 없었다. 연두네 집 바깥주인이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돌았고 얼마 후 누군가 연두네 집 집안의 물건들을 모조리 들어내갔다. 고양이들도 더이상 볼 수 없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연두네 집은 허물어졌고 새 건축물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연두를 잃은 그 날 이후부터 나는 내가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의 나에게는 연두, 너보다 더 완전한 것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원했던 네가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이토록 불완전하고 미숙하게 너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팔이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싼티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늘처럼 고요한 눈…… 그런 눈으로 싼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
“왜 이제 왔어…….”
“…….”
눈 밑으로 축축한 뭔가가 흘러내렸다. 싼티가 손으로 그것을 닦아낸다.
“좀 가까이 와봐…….”
싼티가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약속했던 대로 오랜 시간 미뤄두었던 부끄러운 고백을 아이에게 건넨다. 수줍게 싼티가 웃는다. ……주변에 하얀 날개가 펼쳐진 것 같았다. 너와 함께 있는 곳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깊은 안도감에 잠이 쏟아진다. 천천히 연두가 내 눈을 감겨준다.
나는 경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가슴 쪽 통증과 심한 두통으로 이틀 동안은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압산소치료를 받았고 입원한 지 삼 일 째부터는 수면, 식사, 움직임…… 모든 것들이 정상으로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 회사는 주류 방송사 저녁 일곱 시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회사 건물이 불탄 것 때문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특정 정치 집단의 운영 자금을 몇 년간 대고 있었다는 증거가 어느 내부고발자에 의해 드러난 것이었다. 회사 측에서도 세금 특혜 등 몰래 이득을 챙긴 흔적들이 상당한 듯했다. 검찰 조사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무수하게 쏟아져나왔으나 그것 외에 특별히 회사에 큰 타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일간 뉴스 헤드라인이었던 우리 회사는 삼 일도 되지 않아 다른 이슈에 완전히 묻혀졌다.
……내부고발자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밤 열 시, 불 꺼진 병실 천장을 바라보면 하오 아저씨 등에 업힌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선배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퇴원을 이틀 앞두고 나는 회사로부터 현재 서울에 있는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나는 병원 치료를 끝낸 후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전자문서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유일하게 내게 안부 전화를 걸어온 상미로부터 선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선배는 그날 자바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후 기절했다가 이틀 만에 깨어나 회사로 출근해서 사직서만 제출하고는 두 번 다시 회사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상미는 내게, 선배는 이전에 받았던 연봉보다 훨씬 높은 금액으로 외국계 주류회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선배보다 본인 걱정을 더 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