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사무실에는 윤익 선배와 나 둘뿐이었다.
윤익 선배는 저녁도 거른 채 밤 열 시가 넘도록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내게 윤익 선배는 시선 하나 보내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야근을 한 이유는 윤익 선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싼티를 봐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열 시 오 분…… 윤익 선배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저녁으로 사 두었던 반미를 그제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딱딱한 반미를 씹어 넘기며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일을 하는 척만 했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탕비실에 들어가 블랙티를 진하게 타서 마셨다.
열두 시. ……공기가 서서히 뒤바뀐다. 박하향 같은 신선한 기운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흘러가던 시간이 빈틈을 내면서 조금씩 갈라진다. 아무도 볼 수 없는 풍경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과장 책상 옆에 늘어져 있던 금전수가 잎사귀를 솟아올린다. 소리도 없이 고양이들이 다가와 자리를 잡는다. 도리 선배 책상 위로, 영업 이팀 과장 모니터 옆에, 복사기 위에, 화분 속, 의자 아래에 고양이들이 기어들어와 몸을 뉘인다. 빨강, 초록, 노랑…… 고양이들의 빛나는 보석눈.
유리벽 앞에도 사람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면접남과 삼각김밥녀와 다리찢기녀, 하오 아저씨와 옥망 여사……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았다. 삼각김밥녀와 다리찢기녀는 그새 친구가 된 모양인지 서로 나란히 붙어 앉아 있었다. 삼각김밥녀가 손에 들린 김밥을 둘로 갈라 다리찢기녀에게 건넨다. 다리찢기녀가 그것을 받아 입에 넣고 맛있다며 좋아한다. 다리찢기녀의 긴 웨이브 머리가 싱싱한 미역줄기처럼 늘어져 바닥까지 닿아 있다.
“안녕하세요.”
나는 면접남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면접남은 양복 대신 추리닝 차림이었다. 면도를 하지 않은 면접남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면접남은 나를 보고도 마땅히 할 얘기가 없는지 곧바로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늦게 온 상미가 나를 보고는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상미의 왼쪽 손목에 옥망 여사가 붙여준 밴드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괜찮니?”
상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다. 멀뚱거리며 서 있는 나를 상미가 잡아 이끈다. 상미와 나는 삼각김밥녀와 다리찢기녀 뒤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퍼질러 앉는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돼냥이 그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밑에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민다.
사무실 전등이 모두 꺼진다.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어 올리며 하늘에 대고 반딧불 신호를 보낸다. 잠시 뒤 손전등의 불빛도 사그라든다. ……서서히 달빛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저마다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입을 닫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하오 아저씨였다. 하오 아저씨가 손에 든 종이컵을 말없이 건네주었다. 종이컵 안에 든 빨갛게 우려진 히비스커스…… 나는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차를 홀짝거린다.
달빛에 취해 히비스커스 향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싼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십여 분을 기다려도 싼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하오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싼티는…….”
“어딘가에 있겠지.”
“오늘 출근은 했나요.”
“아마.”
“보셨어요?”
“아니.”
“어떻게 아세요?”
“고양이들이 배고프다고 울지 않잖아. 싼티가 벌써 먹였다는 말이거든.”
“네…….”
나는 싼티를 찾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정대리!”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 날 불렀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옥망 여사였다. 옥망 여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과장 책상을 닦다가…….”
“닦다가?”
“갑자기 시꺼멓던 화면이 탁 켜지면서 말이다…… 영업팀 과장 컴퓨터에 왜 윤과장이 있능강 모르겄다 이 말이다.”
“윤익? 여사님 혹시 증거가 될만한 거라도…….”
옥망 여사는 미쳐 생각을 못했다며 고개를 젖는다.
“여기.”
언제 나타난 것인지 주비서가 옆에 서 있다. 주비서는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폰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며 주비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장은 모르니까 안심해요. 뭐해요? 어서 받아요.”
“…….”
답답하다는 듯 주비서가 내 손에 자신의 폰을 직접 쥐어준다.
“당신에겐 알려줘야 할 것 같았어.”
……나는 주비서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건넸다. 주비서의 폰에는 과장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윤익 선배의 사진이 여러 장 찍혀 있었다. 모두 누군가 윤익 선배를 뒤에서 쫓아가며 몰래 찍은 사진들이었다. 음식점에서 혼자 밥을 먹고, 한강을 걷고, 카페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말문이 막혔다.
“이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윤익 과장…….”
“감시당하고 있네요.”
왜, 무엇 때문에, 누가 이런 사진을 찍었는지, 왜 이런 것들을 과장이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사진 속 선배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몇 년 전 주류업 제품개발 컨퍼런스에서 내게 웃으며 좋은 자리가 있으니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했던 G 사 헤드헌터였다. 왜 이 사람과 선배가 함께 있는 것일까. 주비서의 폰에 있던 사진을 내 폰으로 옮겨 저장해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지금 윤익 선배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 ……윤익 선배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