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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Aug 24. 2024

그러니까 너…… 표정관리 좀 잘 하라고.

윤익 선배는 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그 날부터 거의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카톡으로 안부를 물어봤다. 이틀은 답장을 보내주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윤익 선배와 사무실에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선배와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다녔다. 삼 일 연속 문자에 답장이 없는 것을 보고 내가 자신을 피한다고 느꼈던지 윤익 선배는 주말이 지난 후부터는 나에게 더이상 카톡을 보내지 않았다. 


옥망 여사는 나와 화장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내 옆구리를 슬쩍 찔러보며 윤익 선배와의 일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랬지만, 나는 바쁜 척하며 얼른 자리를 피해버렸다. 하오 아저씨와도 행여나 마주칠까봐 일 층 로비를 지날 때면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야근을 피해 보려고 했지만 밀린 업무로 수요일은 야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익 선배에 대한 복잡한 생각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싼티였다.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자주 어른거렸다. 그럴 때면 탕비실 창고 안에 쌓아둔 샴페인 박스를 뜯어 헤친 후 목구멍에 넘쳐흐를 때까지 샴페인을 들이붓고 싶은 욕구에 흔들렸다. 나는 싼티에게 뭔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웃긴 얘기일 수 있지만 나는 싼티의 표정이 좀 불편했던 것 같다. 


저녁 아홉 시쯤 영업 이팀 진대리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 혼자 사무실에 남게 되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창고로 뛰어 들어가 샴페인 박스를 뜯은 후 샴페인 병을 입에 들이부었다. 몇 년 만에 알코올인지 뇌가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듯했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아 병을 입에 물고 있었다. 한 병을 한 번에 원샷한 후 세 병을 더 까서 한 시간 만에 홀짝거리며 다 먹었다. 방광이 터질 듯이 불러왔고 화장실로 뛰어가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세면대 앞에서 싼티와 마주쳤다. 나는 비틀거리며 싼티에게 걸어갔다. 싼티의 코앞에 내 얼굴을 들이 밀었다.  


“넌 항상 뭐가…….”

“…….”

“넌 항상 뭐가 그렇게…….”

“아휴 술냄새.”

“……말해봐 어?…….”

“정말 추하게 회사에서…….”

“저기…… 너 말야.”

“어서 나가요.” 

“야…… 야…….”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벽에 손을 댄 채 몸의 중심을 잡는다. 

“윤익 과장이랑 뭐 문제 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이씨…….”

“…….”

“말해보라고.” 

“뭐래.” 

“너도 갖고 싶은 게 있지 않아?” 

“갑자기 무슨.”

“사람이든 물건이든 돈이든 집이든 말이야. 그런 거 하나라도 없어?”

싼티가 절레 절레 고개를 흔든다. 

“세상에 그런 놈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택시 불러줄까요?”

발이 꼬였다. 쿵, 화장실 바닥에 그대로 얼굴을 박아 버렸다. 이마가 깨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몸을 뒤집어 벌레처럼 팔다리를 바닥바닥거렸다. 나는 천장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보다 나은 것도 없잖아아아아.” 

“…….”

“너 같은 주제에에에에.” 

“…….”

“너, 야, 너, 야, 야.”

싼티는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겨우 일어났다. 화장실 문에 기대서서는 나를 붙잡고 있던 싼티의 손을 내쳐버렸다.  

“너 뭐 있냐?”

“…….”

“너 뭐 있어서 이러는 거냐?”

“…….”

“너는 그냥 청소부야…….”

“…….”

“대답해.”

“……맞아.”

“그럼 청소부처럼 살아.”

“…….”

“더러운 화장실에서.” 

“…….”

“밟으면 조용히 찌그러질 것 같은 인간이…….”

나는 말을 내뱉으며 방금 전의 말은 도리 선배가 자바에게 했던 말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도리 선배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싼티는 요동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싼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술 깨고 얘기해.”  

“아니. 됐고.” 

“…….” 

“너 말야…… 뭐냐…….” 

“…….”

“신경쓰여. 계속.” 

어지러웠다. 바닥이 계속 발밑에서 흔들렸다. 다리에 있는 대로 힘을 준 채 버텼다.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눈을 부릅 치켜떴다.  

“뭐, 뭐가?”

“……힘드니.”

“……?”

“힘드냐고.”

“무슨!”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너에게 내가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지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심각할 정도로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내가 네 고양이로 보이냐?” 

“…….”

“위로는 네 고양이들한테 가서 하라고…….”

“…….”

“내가 진실을 말해줄까?” 

“…….”

“숨어서 죄인처럼 살아가는 것뿐이잖아. 그것도 화장실에서. 너네 뭐하고 있는 건데? 손전등이나 들고 달빛이나 구경하면 인생이 뭐 달라지는 게 있든? 너희들은 실패했어. 너희가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진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

“너희가 원하는 건 그냥 자기 위로인 거야.” 

“…….”

“질 것 같으니까 그냥 피해버린 거잖아. 그저 자기 위로나 하면서 사는 거잖아. 너희들은 비겁해. 너희는 틀렸어. 너는 틀렸다고.” 

“난 세상을 변화시켜려고 했던 적이 없어.” 

“아, 그러셔…….”

“단지…….”

“…….”

“기억되길 바랄 뿐이야.” 

“누가 누구를?”

“서로에게.”

“헛소리 좀 하지마.” 

사실…… 내 속에서 버그가 출현한 지는 싼티를 만나기 전부터였다. 싼티는 그것을 가속화시킨 것 뿐이다. 고장나기로 선택한 것은 나이므로. 내 감정과 생각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을 뿐인데도 나는 지금 이 사람에게 이토록 화를 내고 있다. 

싼티는 애초부터 맞고 틀리고가 없었다. 싼티의 삶은 어떠한 기준조차도 만들고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싼티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증명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계속 건드리는 것이다. 

“왜?”

“…….”

“너는 내가 불쌍하지?”

“…….”

“근데 나 잘못 살아온 거 아니거든. 나 할 만큼 했거든. 너보다는 노력하면서 살았거든.”

“…….”

“있지. 나는 너보다는…….”

“…….”

“그러니까. 너…… 표정관리 좀 잘하라고…….”

표정관리 잘 하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무슨 말인가 나조차도 납득이 안 가 웃고 만다. 술에 취해 혼자 지껄인다고 생각해도 그만이다. 화장실 거울에 비췬 내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혹여나 상대편에게 맞을까 봐 겁에 질려 먼저 달려드는 술에 취한 살쾡이 한 마리.      


……싼티를 알게 되고 그녀를 가까이서 보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더 명확해지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제일 처음 느껴진 것은 자유였다. 그녀에겐 자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자유가 무엇인지 나는 어렴풋이 기억만 하고 있을 뿐이다. 말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자유를 십 년 전, 친척 언니 결혼식장에서 느꼈다. 친척 언니의 결혼식 날 나는 울었는데 친척 언니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사랑한다고 얘기해줬을 때 그녀의 사랑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울면서도 희미하게 자유롭다고 느낀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것 외에도 그녀에겐 얼굴이 있는 것 같았다. 동료들을 각각 다른 얼굴로 대하는, 겹겹의 가면을 뒤집어쓴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진짜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녀는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마 그런 점 때문인 것 같다. 자바가 내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자바의 질문에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 같았다. 그리고 수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줄줄이 얘기할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나는 싼티와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나는 그런 얼굴빛을 가질 수 없다. 나는 그녀처럼 그렇게 맑게 웃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싼티는 내게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표정이 불편하다.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그녀는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내 것이었던 뭔가를 누구에게 대가 없이 줘 버린 것 같다. ……화가 났다. 왜냐면 그것은 내게 소중한 어떤 것이 분명했기에. 마트에서 장을 볼 때, 폰으로 드라마를 볼 때,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볼 때, 잠들기 전, 아침에 눈뜰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화가 나서…… 점점 더 그랬다. 그녀를 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더이상 그녀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휘청거리며 화장실을 나와버렸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해 그대로 쓰러졌다. 새벽녘 소변이 마려워 눈을 떴는데 어둠 속에서 노트북에 달린 빨간 전원 버튼이 깜빡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거렸지만 십 여분을 헤매도 스위치가 찾아지지 않았다.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기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속옷도 내리지 않고 오줌을 싸버리고는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은 채 다시 방으로 기어 들어왔다. 바닥에 문드러진 채 나는 생각했다. 나는 길을 잃은 것 같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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