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낭

밤 한 알의 따스함

by 서로봄

가끔은 먼 길을 다녀와서도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목적지가 아닐 때가 있다.

이름난 풍경은 희미해지고,

그 주변을 서성이던 사소한 장면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 때가 있다.


설 연휴에 포천 비둘기낭 폭포를 보러 갔다.

갑자기 낮아진 기온이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바람은 이제 막 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의 피부 위에서는 분명 겨울이 속삭였다. “나, 아직 안 떠났어.”


입구에는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군밤을 굽고 있었다.

정확히는 기계가 쉼 없이 밤을 돌리며 굽고 있었고,

주인장은 익은 밤의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껍질이 갈라질 때마다 뽀얀 속살이 드러나며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한 봉지 오천 원.

꼭 열 알.

그리고 손바닥 위에 살며시 얹어주던 덤 한 알.


막 점심을 먹고 왔음에도

나는 그 봉지를 사 들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손은 따뜻함을 원했던 것 같다.


봉지 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 온기가 맛이 되었는지,

맛이 온기가 되었는지

잠시 헷갈렸다.


꺾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웅덩이에는 물이 제법 고여 있었으나

정작 폭포에서는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방울도.


물이 흐르지 않는 폭포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정지된 폭포는

기대가 빠져나간 자리처럼

조금은 허전했다.


고인 물은 유리알처럼 맑았는데.

비둘기들의 보금자리라 했는데.

그곳에는 흘러내리는 폭포도,

구구대는 비둘기도 없었다.


둥글게 패인 소(沼)는 깊이를 숨긴 채

어둡고 고요했다.

그 형태는 마치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해 준비된 그릇 같았다.


언젠가 물이 차오르면

이곳을 넘쳐

한탄강으로 흘러들겠지.

흐르지 않는 지금은

어쩌면 흐르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주머니 속에서

남겨둔 밤 한 알이 만져졌다.

아직 식지 않은 온기.


그날의 폭포는 흐르지 않았지만

내 손 안에서는

작은 온기 하나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장대한 풍경이 아니라

그 앞에서 잠시 따뜻해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고.


폭포는 비어 있었고

겨울은 미련을 남기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손 안의 밤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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