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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Oct 23. 2023

004. 절반이나 채워진 물 잔.

<계층이동의 사다리./루비 페인>

택배는 날씨와 기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관심도 없던 하늘을 살피게 되고 일기예보도 자주 챙겨보게 된다. 매일 마주하는 날씨도, 인심도 택배기사의 능력을 벗어나는 어찌 할수 없는 영역이다.


택배를 하면서 자연스레 하늘을 살피는 겸손을 배우게 된다.       

갑자기 비가 오더니 바람도 강하게 불면서 추워졌다. 성큼 겨울로 들어서는 걸까. 레일 곁에 선 동료기사들의 옷차림이 두툼하고 길어졌다.

추워진 날씨에도 유일하게 반팔, 반바지를 입던 이십 대인 막내 S도 오늘은 긴소매, 긴바지를 입었다. "정말 추워졌나 보네."라는 아내의 말에 자신은 괜찮은데 주변에서 하도 안 춥냐고 해서 마지못해 오늘은 길게 입었다며 배송할 때는 다시 짧은 옷으로 갈아입을 거란다.

막내 S는 새엄마랑 살다가 최근 독립했다. 부모에게서 살가운 챙김을 받고 자라지 못한 것 같은데 심성이 착하고 배려심이 많아 아내는 그의 부모는 자식복이 있다며 늘 칭찬이다. 사람의 심성이란 환경에 영향은 받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듯싶다.

아내 곁에서 늘 살가운 말동무인 삼십 대 H가 오늘은 집하할 것도 많은데 몸이 아프고 안 좋다며 걱정한다. 아내가 몸살약을 챙겨 와 먹였다. 택배는 몸이 아파도 쉽게 쉴 수가 없다. 아들 또래의 젊은 택배기사들이 이른 새벽부터 늘 매여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짠해진다. 아내는 부모들이 자신의 아들들이 이렇게 힘들게 택배 하는 모습을 직접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했다.


"가난한 사람은 사고를 당해도 가난하게 당하나 봐요."


오랜만에 방문한 뻥튀기 여사장님이 아내에게 하소연한다. 중국인 불법체류자에게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차량과 뻥튀기 기계가 다 손 될 정도로 사고가 꽤 컸나 보다. 사장님도 사고후유증이 생긴 것 같은데 불법체류자라 제대로 보상도 못 받았다.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새로운 차량과 뻥튀기 장비구입 등에 대한 추가로 발생한 비용으로 근심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대물림되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모진 말이 있다. 가난한 이들을 모멸하는 의중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부자와 빈자계층 간에 불문율은 존재했다.



대물림되는 가난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관계'가 돈보다 중요하다. 빈곤층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는 '가욋돈'이 생기면 나눠갖는다는 것이다. 중산층은 자립적인 생활을 각별히 중시하지만 빈곤층은 자신이 결코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욋돈'이 생기면 즉시 사용하거나 서로 나눈다.    

가난이란 한 개인이 자원 없이 지내는 정도를 의미한다. 대부분 가난을 '재정적 자원(돈)'측면에서만 다룬다. <계층의 사다리>의 저자 루비 페인박사는 사람들이 계속 가난에 머무는 원인으로 추가적으로 정서적 자원, 지적 자원, 영적 자원, 신체적 자원,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지원시스템, 부모의 관계, 역할모델, 불문율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특히 계층 간(빈곤층, 중산층, 부유층) 불문율이 되는 지식이 존재하는데 계층 간 이동을 위해서는 이러한 불문율 지식을 전해줄 수 있는 조언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계층 간의 불문율을 예를 들자면 돈의 경우 빈곤층은 소비대상으로, 중산층과 부유층은 각각 관리, 투자대상으로 여긴다. 결정할 때 중요기준으로는 빈곤층은 생존, 중산층은 결과, 부유층은 전통과 예절로 다르다.

루비 페인 박사는 이런 계층 간 '불문율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계층 간 차이를 비난하기보다는 이해와 협상을 통해 원활한 계층 간 이동사다리를 확보하여 가난을 사라지게 하는 현실적 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계층 간 이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반만 채워진 물 잔과 같다고 표현했다.


이때 부족한 부분을 교육과 관계를 통해 해당계층의 불문율 지식을 수용하며 더 채워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때 루비 페인 박사는 강조한다. 반만 채워진 물 잔은 반밖에 없는 '결핍'이 아니라 반이나 가득 찬 물 잔에 '첨가'하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간밤에 큰아들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밤늦게 전화를 한 것은 무슨 고민이 있다는 의미다. 부서가 통폐합되면서 팀장과 함께 본사로 들어가게 되었다며 이런저런 고민이 되었나 보다. 모자지간에 무슨 대화를 하는지 간간히 아내가 "너는 어쩌면 30대 네 아빠랑 똑같니....". 아빠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런저런 조언도 하고 당부를 하는 것 같다.

 

이럴 땐 나는 아들을 위한 '인생의 교보재'로 조용히 활용되는 역할이 전부다. 아빠처럼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한 걸음씩 선택하고 나가라며 아내가 조언하는 듯싶다. 내 인생의 실패 교훈도 아들들에게 유용한 유산으로 활용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힙합래퍼인 스물세 살 막내아들이 온라인으로 강의를 한다고 했다. '비트'를 만드는 법을 한 달에 네 시간 가르쳐 주는 조건으로 강의료도 받았다고 한다. 온라인으로 기꺼이 강의료를 내고 배우려는 젊은 층의 모습이 신기하다.


한동안 심드렁하게 음악 하던 아들이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열심히 준비하고 가르친다.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듯싶은 아들에게 넌지시 정규음악 수업을 받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권했지만 내키지 않아 했다. 남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배울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수업인데 세 시간이 넘어간다. 대견하다며 격려하고 축하해 줬다. 아들이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일을 찾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한참 배송을 하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들고 가던 가벼운 상품이 날아갈까 봐 붙들고 잠시 서있었다. 바람에 통 넓은 작업바지가 정신없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아내랑 막내가 재밌다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문득 아내가, 아들들이 늘 이렇게 웃으며 살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해졌다.

나와 아내의 인생은 루비 페인박사가 가난정의한 8가지 자원 모든 측면에서 빈약했다.


하지만 아들들에게 이런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이 실패로 점철되었고 가진 재산도 없지만 아직 우리가 가진 자원이 반이나 채워져 있음에 감사해다.



아들들을 우리처럼 아무런 조언이나 따스한 챙김 없이 지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을 외롭고 힘겹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열심히 살아야 할 의미손안에 슬며시 잡히게 한다.


이럴 때면 나를 때때로 힘겹게 했던 택배가 새삼 감사하고 고마워진다.

막내가 이젠 내일 택배 하러 가야 하니 그만 자라고 보챈다.  오늘은 여러모로  감사한 휴일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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