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시간에 살던 한 90세 할머니가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태어난 미시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치료대신에 아들부부와 함께 13개월 동안 미국 32개 주, 75개 도시를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 할머니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미국횡단 이야기는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아들은 어머니가 선택한 마지막 여행의 의미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인용해 말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망각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주춧돌처럼 자기 안에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 있습니다."
'노마 바우어슈미트' 할머니는 마지막 13개월 동안 구십 평생보다 더 많은 추억을 선택했다. 일 년이 지나간 30년보다 더 길었다고 할머니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선택이라는 행위를 상실하는 순간부터 인생은 그렇고 그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삶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삶이라는현실 속에서 키오스크 앞에서 시작되는 소소한 자극부터 생사를 결정짓는 생명연장거부 서명 같은 살 떨리는 요청들까지 무수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선택이란숨 가쁘게 반복되는 자극과 반응들 사이에 좁고 은밀한 틈 속에서 찰나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사람은 선택할 겨를 없이 쏟아지는 삶의 자극을 따라 습관적인 반응으로 일상을 채우곤 한다. 실존적 공허감, 깊은 허무감에 빠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빅터 프랭클박사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사람의존재가치는 생존한다고했다. 비참한 수용소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간직한 이는 생존했고 그것을 상실한 사람은 자살하거나 죽어가는 모습을 그는 곁에서 지켜봤다. 그 자신도삶의의미를 바탕으로 한 '의미치료(로고테라피)'를 반드시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신을 생존시켰노라고 고백했다.
삶이 제멋대로잔인하게 휘돌아 쳐도 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스스로 어떤 반응(태도)을 선택할지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선택할 의지가 사라지는 순간 사람은 살아갈 이유를 상실한 존재로 전락된다. 세상은 늘 우리를 물질로, 때론 사육하는 가축으로 삶의 가치를 하락시키려 끊임없이 시도한다. 선택의 자유를 가진 고귀한 존재가 아닌 그냥 수단이나 소모품적인 존재로끊임없이 격하시키려 한다.
소아과전문의가 부족하다는 뉴스에서 의사가 환자를 의료수가를 높이기 위한 물질로 여기는 건 아닌지, 하마스에게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는 인질이 된 수많은 여성들을 전 세계에 고발만 하는 힘 있는 미국의 소극적 모습에서 전쟁에 대한 정당한 명분확보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비열한 의도가 읽혀불편하기만 하다.
요즘 수많은 택배기사들이 밤잠을 못 이룬다. 단순히급여 150만 원 깎이는 이유가 전부가 아니다. 회사가 택배기사를 대하는 모멸적인 방식 때문이다. 수천억의 흑자를 기록한 기업이 제시한 삭감의 논리가 싫으 면 그만두라는 식의 일방적인 통보 앞에 뒤통수를 맞는 듯한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택배노동자는 회사와 공생하는 존재가 아닌 일회용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자본시장의 논리 앞에서 사람의 가치를 상실당한 노동현실 앞에서 깊은 자괴감과 선택조차 할 수 없는 처지라는 비루함에 힘겨운 택배를 마치고 돌아온 늦은 밤시간에도 수많은 택배인생들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의미한 삶이라는 현실의 차가운 맨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라고 했다. 그냥 맞불 놓듯이 그런 인생에게 덤벼들라고 한다. 자살이든 살인이든 극단적 선택조차도 인간이 살아야 하는 존재가치를 지키는 유일한 행위가 된다고 여겼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런 실존주의의 극단성을 다소 순화시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선택의지를강조했다.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상상을해서라도 선택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선택은 너의삶은무의미하다고 조롱하는 세상을 향해 아니라고, 결단코 그렇지 않다고 저항할 수 있는 인간됨을 상징하는 유일무이한 행위이자 권리인 셈이다.
이런 성스러운 삶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선택의 경계 앞에 설 때마다우리는 늘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옳은 선택을 하는 기준과 잣대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되물음에 주춤거리게 된다.
사람들은 옳다와 그르다, 단 두 가지 극단적인 흑백의 잣대만으로 판단하고 그 사이의 회색지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좋은 선택이란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착각한다. 일의 결과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사후결과 편향성>은 좋은 선택을 할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선택의 질과 결과의 불완전한 관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변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택 결정의 질과 운. 이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의 결과는 운처럼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선택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저 가능성이 낮았던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 것뿐이다.
세상에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확실한 건 그렇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에 빠져 선택하는 행위는 위험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다.내 멋대로, 내 편한 대로를 부추기는 시류 속에서 쉽게 용인하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라는 말을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은 더 나은 의사결정자가 되는 데 있어 첫 번째 단계다.의사결정전문가 애니 듀크는나 자신이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늘 매번 틀린 선택을 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은 덜 틀린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재탄생하는 것뿐이다. 나는 선택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보다 선택하는 행위가 더 중요함을 현실을 살아가며 깨달았다.
오랫동안 일해왔던 직업을 버리고 택배를 선택했다. 연속된 선택의 실패 속에 택배기사가 되었다고 할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최소 매달 500만 원이상의 수입과 64세이상까지 일할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는 일자리를 원했다. 두 가지 조건으로놓고 따져보면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 가족과 함께 일하며 더좋은 주거환경 속에서 생활하고힘든 일이지만 일과를 마치고 이렇게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는그저 참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택배를 선택한 지난 4년 간을 뒤돌아보면 내가 선택한 것들에 대한 회의의 연속이었다. 2019년 추운 겨울에 첫배송에 나서서 겪은 깊은 좌절감, 캄캄한 새벽에 익숙하지 않은 포터를 몰고 낯선 센터를 향하던 두려움, 갑질하는 진상고객과 대리점 소장에게 당한 시달림, 형편없는 수임료에 뜬눈으로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 다시 택배 하러 집을 나서야 했다.
형편도 안 되는 주제에 새 아파트를 사겠다고 덜컥 계약을 하고는 택배에 적응하랴 이사를 준비하랴 죽을뚱 살뚱 한 해를 보내야 했던 시기를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하다.
잘못된 인연으로 새로운 대리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첫 출근해서 똥 짐 범벅인 구역을 받아 첫 배송을 나설 때 씁쓸했던 느낌과 뭔가 잘못 선택했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쿠팡이 택배시장의 대세로 떠오르며 높은 수수료와 근무조건으로 택배기사를 모집할 때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가족들과 치열한 상의 끝에 잔류를 결정했지만 우리의 선택에 대한 회의감은 늘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좋은 미래의 기회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두려웠다.
하지만 매번 선택과 실패 그리고 후회의 반복되는 사이클을 맴돌았지만 상승하는 나선형처럼 우리는 조금씩 비상하듯 상승하며 회복하고 있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그저 가능한 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최선을 다해 추측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한 번에 조금씩'이 장기적으로 성공을 향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선택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을 조금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것이 더 중요하다. 세상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노마 할머니처럼 일 년이 지난 30년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겼던 그런 현명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