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삼촌 Sep 04. 2024

가여운 크산티페

이상과 현실의 수레바퀴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수많은 젊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플라톤'은 잘생기고 부유한 귀족출신으로 당시 '엄친아' 위치에 있었지만 그런 그도 '소크라테스'가 지닌 지혜를 흠모하며 따르던 수많은 청년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추남과 미소년 엄친아의 '브로맨스'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부각하며 점점 흥미를 끌던 동영상 철학강의를 곁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들었는지 아내가 툭하니 한마디 내던진다.


-난 소크라테스가 싫어.


-왜?


-그 사람은 뛰어난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아내를 고생시킨 무능한 사람이쟎아. 그래서 싫어.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라는 우아한 명구가 사정없이 구겨지더니  한구석으로 맥없이 처박히고는 방바닥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이내 아내의 청소기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


여자는 손에 잡히는 현실에 살고 남자는 허망한 야망에 산다. 아내는 배부른 돼지가 될지언정 결단코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선택하지 않으리라.


여자인 아내에게 찬란한 지혜를 지녔어도 소크라테스는 그저 무능한 남편일 뿐이다.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평생을 고생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아내를 고생은 고생대로 하게 만들고 '세기적인 악처'의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만든 남편인 소크라테스의 '무능함'에 대해 아내는 분노를 넘어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세에 감히 뭐라 입을 떼기 힘든 살벌함마저 느껴졌다.


무능한 남편인 소크라테스를 향한 분노의 불똥이 수천 년의 시공을 건너서 행여나 나에게로 튀어올까 봐 슬그머니 영상을 꺼야만 했다. 경제력이 없는 남자는 눈치라도 빨라다는 오랜 결혼생활로 생겨난 비굴한 생존본능이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게 다.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는 지혜란 존중받을 수 없다는 아내의 현실중심적인 판단매정하고 비정하게 여겨지다가 문득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인 나를 안 버리고 지금까지 데리고 사는 아내의 기준은 또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혹시 배용준(배우 최지우가 '실땅님' 했던 그 배용준이 맞다.) 닮은 나의 외모 때문인 걸까.

니면 삼십 년을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면서 자연스레 우러난 짠하고 측은한 감정 때문인 까.




경제력 없는 남편을 만난 아내는 가지고 싶어도 참으면 산 것이 참 많은 가여운 여자다.


1995년도 혼을 위해 종로귀금속방에 함께 가서 다이아반지 대신 가짜 다이아반지를 예물로 맞췄다. 돈 벌어서 큼지막한 다이아반지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사줄 기회가 생겨났지만 살면서 이런저런 삶의 우선순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버려 아내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 잘난 다이아반지가 없다.


세월은 지나고 지나 택배까지 하느라 아내의 손은 망가지고 주름만 생겨났다. 남편 잘못 만나 이쁜 손 다 망가졌다며 곁에서 신세한탄하는 아내를 향해 다이아반지 대신에 다이야 같은 눈빛으로 평생을 바라보겠다는 말에 어디 인생을 날로 먹을 셈이냐는 강력한 아내의 응징에 쩡한 두 눈을 뽑힐 뻔했다. 


어찌 보면 가난이란 녀석이 나에게 아내를 선물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저 나만 바라보는 바보같이 순수한 여자를,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로 말이다. 가끔씩 나의 크산티페가 퍼붓는 온갖 잔소리와 박대에도 바보같이 내가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다.


마틴 부버가 세상은 두 겹으로 구성되었다고 다.

<나와 그것>.

그리고 <나와 너>라는 두 겹의 인연이 거대한 담요처럼 우리를 겹겹이 뒤덮고 있다.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나와 그것>이라는 모진 물질적 세계를 뚫고 <나와 너>라는 인연의 세계로 힘겹게 서서히 나아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몹시 무더운 휴일 아내와 함께 아파트 정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이천 원짜리 아이스커피 한잔과 스마트폰 음악을 들으며 그늘진 산책길에서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보던 아내가 이걸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는 아들과 함께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가성비를 따지며 가볍게 고민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는 지나갔다.


택배 하러 나가는 새벽 포터 안에서 전날 우울한 사건이 우리의 대화주제가 되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남성이 아령을 손목에 매고 바다에 투신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자살한 영혼을 신은 벌을 내리실까.


-글쎄, 만일 그런 신이라면 못 믿을 것 같아. 이 세상에서 모진 아픔을 견디다 못해 저세상으로 갔는데..


-이 세상은 강한 사람만 살아남을 것 같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의지로 살아낼 수 있다고 하던데.


-당신에게 삶의 의미는 뭐야.


우리에게 삶의 의미는 서로이고, 사랑하는 아들들 임을 살면서 진하게 느끼곤 한다. 남편은 허황된 꿈에 살고 여자인, 아내는 그런 남편의 사랑에 산다. 그렇고 그렇게 서로 동떨어진 부부가 간격을 좁혀가며 <너와 나>의 관계로 가녀린 서로를 단단하게 엮어가며 살아내 있었다. 


아내를 통해 나만의 자부심도 생겨난다. '소크라테스'조차 가지지 못한 돈이 없어도 아내를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를 하나씩 체득하며 산다는 그런 '몹쓸' 자부심 말이다.


어찌 보면 여자인 아내에게 진정한 다이어반지남편인지도 모르겠다. 다정하게 자신만을 위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는 진정한 '다이어반지'가 아닐까.


그 잘 난 '다이아몬드'결정체를 이루기 위해 삼십 년이 넘어가는 중이다. 가여운 우리 아내는 과연 죽기 전에  제대로 된 다이어반지는 껴볼 수 있을까. 그냥 실물 '다이아'반지를 사서 선물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의 명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