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리베카 솔닛>
배송지에 도착해서 탑차문을 여는 순간부터 택배기사의 걷기는 시작된다. 만두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도로변에 포리를 세우고 아이스박스 상자들을 들고 걷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서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송장에 적힌 어두운 호실문 앞에 택배상자를 내려놓는다. 요즘 점집 00 암은 침체된 경기 때문에 찾는 손님이 많은 건지 자주 홈쇼핑상품을 시킨다. 좁은 철제사다리를 간신히 헤집고 올라가 상품을 올려둔다. 물류센터의 상승하는 나선형 진입도로를 따라 커다란 화물차들과 함께 빨려가듯 들어가 여기저기 흩어진 도크와 사무실을 찾아 택배상자들을 바쁘게 배웅한다.
요즘 캠핑과 차박열기 때문인지 대형문구점 2층에 오픈한 캠핑용품점으로 대량의 캠핑용품들과 문구상품들이 주말이나 휴일전날에 배송상품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캠핑테이블, 의자들도 보인다. 하지만 너무 무겁다. 부지런히 상품들을 상품전용엘리베이터 속으로 옮겨 놓고는 닫힘 버튼을 누르는 순간 큰 짐은 덜어냈다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아파트단지에 도착해서는 엘리베이터와의 동행이 시작된다. 나의 배송구역의 첫 번째 아파트단지는 2천 세대가 사는 대형단지이지만 오래된 구형 아파트단지라 엘리베이터가 오래되어 많이 느리고 취소버튼이 작동되지 않는다. 한번 잘못 누르면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층수버튼을 신중하게 눌러야 한다. 저층의 경우에는 계단으로 오르내리며 배송을 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택배를 하기 전 간혹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배송기사들의 표정이 왜 저렇게 무겁고 어두울까 생각했었다. 택배초기에는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며 나름 차별화된 택배기사를 시도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처럼 속도가 시간을 벌게 한다는 현실에 빠져들어 늘 촉박하고 무표정하게 서둘러 걷고 있었다.
내 몸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세상을 통해 내 몸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생산적 노동과 걷는다라는 행위의 공통점이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며 걸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보행하는 인간이 가진 힘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속도가 시간을 벌게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속도가 만들어낸 환상속에 빠지게한다. 그러나 조급함과 속도가 시간을 가속하면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고 서둘러야 할 시간들은 하루를 더 짧게 만든다.
속도의 환상에 빠져 걷는 순간부터 내가 가는 배송구역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부부가 양손에 한가득 짐을 들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나는 배송할 층수 버튼을 누르고 배송하는 몰염치한 실수를 했다. 조급함과 짜증 섞인 감정으로 뒤범벅된 채 지켜낸 몇 시간은 그저 허탈감과 탈진으로만 다가온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택배기사 소통카페에서 험지를 배송하는 택배기사 사연이 생각난다. 시간당 60건을 배송할 수 있는데 험지에서는 30건도 배송하기 힘들다고 한다. 특히 한두 건을 배송하는데 왕복 5킬로를 30분을 소요하며 배송할 때는 속이 까맣게 탄다고 했다. 그런데 그전에 이 구역을 배송하던 선배 택배기사가 사정이 생겨 인수인계를 하시게 되었는데 이곳 사람들과 그동안 정이 들어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워하더란 사연이었다.
베테랑 택배기사와 초보 택배기사의 배송구역을 바라보는 시선과 걸음의 호흡이 다르다.
느림의 걸음이 지닌 비밀은 풍경에 천천히 다가가다 보면 그 풍경이 조금씩 친숙해지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자주 만나다 보면 우정이 깊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다가서는 것이라기보다는 거기 있는 것들이 우리 몸속에서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택배를 하며 걷는 순간마다 내 속으로 이곳 사람들이, 풍경들이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며 걷고 싶다. 속도와 조급함으로 갈기갈기 찢겨나간 매 순간을 기워내고 관계를 연결하는 바늘질하는 택배기사처럼 말이다.
걸어가는 택배기사는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리베카 솔닛을 오마주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