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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택배레일 곁에서

by 코나페소아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



한참 배송하던 중간에 급한 연락이 왔다. 입원하셨던 장인어른이 오늘밤을 넘기시기 힘드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아내는 나를 두고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병원으로 향해야만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내는 아빠에게는 죄송했지만 병원과 장례식장에서 온통 내 걱정으로 마음이 심란했다고 한다. 아내도 아내지만 혼자서 배송일을 마무리해야 했던 나도 정신없이 배송했는지 오배송이 생겨났다.


장례식 등 급한 경조사에 쉽게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게 택배기사다. 대리점에서 다른 동료기사들에게 부탁해서 배송을 분담할 수도 있지만 다들 힘들게 배송하는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부탁하는 게 그리 쉽지 않다. 내가 힘들면 남도 힘든 거다. 처지를 알기에 가급적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할 수밖에 없다.


급한 장례식에도 쉽게 갈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이 택배기사의 매여사는 처지가 실감되면서 참 고통스러우면서 회의가 생겨난다. 언젠가 tv에서 왕년의 청춘스타 얄개 이승현 씨가 재혼 후 부부가 파전가게를 하며 사는 일상을 방송했다. 그때 처형의 급작스런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사전에 예약했던 단골손님들의 항의전화에 부부가 상의해서 다시 올라와 예약손님을 치르고 다시 장례식으로 향하던 장면을 보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왜 이리도 인생을 구차하게 만드는 건지 이렇게까지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구차한 상황들이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빅터 프랭클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수감자들은 모든 것을 거부한 채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는 말한다.

힘겨운 순간들을 뒤로하고 택배박스를 토해내는 레일 앞에 다시 섰다. 아무런 치장도 없는 황량한 공간이지만 레일이 돌아갈 때면 알 수 없는 생기가 휘감아 돈다. 활기가 생겨난다. 00 형님이 슬며시 흰 조의봉투를 내밀며 힘내라고 다독인다. 아들뻘되지만 형님이라고 깍듯하게 호칭하는 00 이도 멋쩍은 듯 조의봉투를 건네고는 자기 자리로 총총히 사라진다.


오늘도 택배기사는 돌아치는 질긴 속박 같은 레일 곁에서 미래를 기대하고 희망을 선택하며 다시 선다.


인생이 준 최고의, 최후의 선물은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그런 자유를 잃지 않고 살아낼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결코 구차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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