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감기몸살에 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우리의 택배예비군인 아들은 동원예비군으로 나라에 4일간 차출되었다. 배송해야 될 물량은 이젠 비수기를 벗어나려는지 상승곡선을 보이고 있어 걱정이 된다. 아내는 몸이 안 좋은 상태이고 지원군까지 없는 상황에 처하니 심적으로 부담되고 마냥 힘들기만 했다.
나마저 아프면 큰일이라며 아내가 각방을 쓰자고 했다. 나는 내 베개를 아내 곁에 두고 홀로 서재방으로 건너왔다. 일 때문에 지방으로 출장 가 있던 때 이외는 이렇게 각방을 쓰는 건 처음이다. 늘 셋이서 함께 하다가 홀로 있는 이런 상황이 낯설고 생소하기만 하다.
<철부지 사회>를 쓴 '가타다 다미미'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전 국민 철부지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의미는 살면서 다양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유아적인 만능감과 자기애적인 이미지 등을 자연스레 포기할 줄 안다는 의미다. 즉, 자기중심적인 세계와 현실에서의 자신 간의 격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안다.
포기를 하지 못하는 '성숙 거부자들', 다른 말로 <대상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그 결과 참을성, 저항력부족, 책임전가경향을 보이면서 술, 약물 등에 대한 심각한 의존증을 보이는 사회적 문제들로 표출된다고 진단한다.
택배를 선택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새롭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인생의 갖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기에 사회적 약자계층으로 비치는 택배일을 선택할 수 있었고 잘 적응해 오면서 한층 내적으로 성숙되어가고 있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가족과 택배를 하는 순간마다 나는 '아직도 철부지'라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뜻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요동치는 분노와 짜증이라는 감정코끼리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아내와 아들이 나의 보호자와 같았다. 참을성, 저항력이 부족한 나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분신과 같은 아들과 함께 일하며 나의 모습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곁에서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 꼭 닮은 어그러진 감정선과 선택, 처리방식들을 보면서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택배를 하는 현실이 힘들기보다는 이제껏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롤모델을 아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아버지였다는 자책이 더 아프고 힘들게 다가왔다. 내 곁에서 그런 나를 견뎌내며 참았을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깊은 자성도 하게 된다.
<대상 상실>이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리고 아파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해야 한다는 현실을 잊고 회피하기 위해서 소비에 빠지고, 약에 취하고, 돈에 목숨 걸고 살지만 늘 욕망에 휘둘리는 상황뒤에는 공허와 허무, 죽음 같은 우울감만 남을 뿐이다.
반백년 넘게 살아보니 인생에서 성취보다는 포기해야 하는 게 더 많았다. 그럼에도 포기하기를 주저하며 사니 인생철부지라는 딱지는 언제나 떨어질지 아득하기만 하다.
정신과의사인 저자는 고뇌하고 갈등하며 사는 삶의 모습이 성장하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 포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기하며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조언한다.
성숙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은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고민하지만 결코 회피하거나 도피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장으로서 우리 가족들에게 보여줘야 할 성숙한 어른의 모습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