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도 이렇게 나이 들었으면 좋겠어." 큰 녀석이 불쑥 스마트폰을 내민다.
유명 50대 유튜버인데 영국식 짧은 머리스타일에 핏한 검정티에 청바지를 입고 할리데이비스를 배경으로 서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몸을 단련하고 치장하는데 꽤나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자되었을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더 많이 필요한 시대를 산다.
반면에 모든 가치가 돈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돈 없는 사람들이 겪는 모멸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우리가 겪는 모멸의 많은 부분이 따지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다.
차브(chav)란 영국의 가난한 저소득계층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다. 단순히 빈곤층을 의미하기보다는 경쟁에서 탈락한 루저집단이자 사회적인 부담만 가중시키는 쓰레기 같은 존재로 의미된다.
차브(chav)는'공영주택(Council)에 살면서(Housed And) 난폭한(Violent)'의 머리글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차브'의 저자 '오언 존스'는 영국사회에서 점차 노동계층이 붕괴되어가며 그들이 최하계층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난무하는 '모멸'과 '불평등'을 발견했다.
영국의 정치권과 중산계층이 극히 혐오하고 저주하는 '차브'들이 사실은 그들의 한계 때문이 아닌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돈이 없다는 사실은 단순히 빈곤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건 빈곤해서가 아니라 견디기 힘든 모멸감 때문이다.
고객이 택배를 받은 후 택배비를 지불하는 후불제 개념인 '착불료제도'가 있다. 2,500원에서 6,000원 수준이다.
고객입장에서는 편리하지만 택배기사에겐 배송업무 외 착불료 수금이라는 과정이 추가되기에 번거롭다.
단돈 2,500원을 수거하려는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참 크다. 바쁜 배송으로 착불료를 챙기지 못하면 고스란히 부담해야 되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푼돈 같지만 월말이면 수십만 원이 된다.
"안녕하세요. 오늘 착불상품료 입금해 주세요."
"지금 바쁘니 내일 보내줄게요."
그러고는 감감무소식인 경우 다음날 챙겨서 또 연락을 해야 한다.간혹 적은 금액으로 채근한다, 독촉한다, 떼먹느냐 등 고객항의가 부담스러워서 수금이 될 때까지 이래저래 신경이 쓰인다.
대부분의 고객은 잘 챙겨서 보내주시지만 간혹 계좌입금방법을 몰라 당일입금을 못하시는 노인분들이나 외국인들이 간혹 계신다.
자녀나 지인들을 통해 늦게 보내시곤 미안해하실 때면 오히려 부담을 너무 많이 드린 건 아닌지 자책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지금까지 택배를 하면서 딱 한번 2,500원인 착불료를 떼였다.
온라인 상품을 약국에 배송했는데 약사가 보낸 업체가 잘못처리 한 것이니 거기서 받으라며 화를 냈다. 약사가 상담사와 통화하며 저 사람과 말하고 알아서 처리하라며 핸드폰을 넘겨주는데 온라인상담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쩔쩔매는 상황이었다.
주문한 이도, 상품을 보낸 업체도 아닌 제삼자인 상담사와 택배기사만 서로 핸드폰을 사이로 황당해하는 형국이다. 2,500원에 모멸감을 처음으로 느껴본 순간이었다.
"착불료는 제가 내겠습니다."하고 나왔다.
그곳은 배송상품이 있으면 항상 여기다 놓아달라, 저기 놓아달라 요구만 있을 뿐 흔한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다.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고 약사는 사회적 계층구조에서도 나름 지식층에 속할 텐데 사람을 대하고 처우하는 모습이 참 씁쓸하기만 했다.
배송구역 아파트에서 한창 배송 중이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면서 노년의 신사분이 뒤늦게 탔다.
엘리베이터 층수버튼이 여러 층 눌려있는 것을 보더니 "사람이 탔으면 먼저 내리게 하고 택배 하든지 하지 뭐 하는 짓이야. 배려를 모르는구먼 배려를."
노신사분의 손에는 골프채가, 내손엔 택배박스가 잔뜩 들려져 있었다.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더니 "허참, 주민이 뭐라고 하면 잠자코 들을 것이지."
라는 면박이 되돌아왔다.
노신사가 말한 배려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받는 택배는 기쁘지만 그것이 전달되기까지 관여하는 수많은 손길들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2,500원에 그 모든 의미를 생략시키고 대체해 버렸다.
돈에는 사람들의 허세와 모멸이 함께 묻어있었다.
택배를 곁에서 돕는 젊은 아들이 이런 불합리하고 모멸스런 상황에 처할 때마다 감정적으로 격해지 곤 해서 우려스러우면서 계속시켜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함민복/긍정적인 밥>
우리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돈을 넘어선 그 무엇을 통해서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의미를 발견하고 실현할 때 인간은 인간다워지고 행복해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돈 뒤에 가려진 사람들에 대한 멸시는 점점 더 커져만 갈 것 같다. 그런 상서롭지 못한 조짐들은 매일 뉴스를 통해 심심하지 않게 접하게 된다.
작년에 입사한 큰아들이 최근 구입한 중고차를 팔고 신차를 새로 주문했다. 우리는 신중할 것을 권했지만 새 차로 자신을 주위에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작은 아들은 거의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한다.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는 돈 버는 직업이 아니니 무조건 안 쓰고 모아야 한단다.
돈이 너무 많은 일을 좌우하고 돈 때문에 모멸감을 맛보기 일쑤인 현실에서 많이 가진 형이, 없는 동생을 보살피지는 못할지언정 모멸하는 형제관계가 될까 걱정이 된다.
레일에서 간혹 깨어진 아이스박스가 생길 때가 있다. 옆의 동료기사가 살며시 칼로 포장된 테이프를 조심스레 잘라내고 깨어진 박스를 잘 맞추고는 테이프로 붕대 감듯 잘 감싸는 모습은 마치 숙련된 외과의사 같다.
젊은 택배기사가 수하처가 불분명한 상품송장을 찬찬히 한참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고시공부에 집중하는 고시생같이 진지하다.
배송될 상품박스에 조심해서 배송해 달라는 익살스러운 문구가 쓰여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무거운 쌀박스에 '살살 다뤄주세요. 소중한 상품이 아파요.'라고 쓰인 문구를 볼 때마다 '택배기사의 팔다리는 더 아파요ㅜㅜ.'라고 쓰고 싶어 진다.
언젠가 약국에 무거운 약상자박스를 여러 개 배송한 적이 있었다. 애써 문입구에 쌓아놨더니 남자약사가 너무 무거워서 여기 두면 안된다며 안쪽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해 왔다.
순간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택배기사도 팔이 많이 아픕니다."라는 말이 툭하니 나와버렸다. 순간 남자 약사분이 망치로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아. 네에." 했다. 마치 '응? 팔이 아퍼?택배기사도 사람이었구나.'하는 듯 했다.
왜 같은 사람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무심하게 사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다.
배달음식을 앱으로 주문하면 그것으로 소비자로서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쁜 배달시간에 쫏기는 배달기사를 위해 미리 나와서 상품을 전달받고 계산하는 동안 엘리베이터 지연버튼을 눌러주는 이들도 있다.
신영복선생은 사람이 누리는 기쁨과 슬픔의 근원은 관계에 있으며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최고의 관계라고 역설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늘 고민하며 산다.
고민의 초점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의 관계에도 맞춰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 나란 존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사이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