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없는 날을 포함해서 사흘간의 연휴가 시작된 첫날이다.
장마, 열대야, 땡볕, 태풍, 그리고 소나기에 시달리며 배송하느라 힘겨움이 진하던 지난 시간들은 삼 일간의 연휴를 한층 더 설레고 달콤하게 만들어놨다.
마치 어둠이 짙을수록 밤하늘의 달과 별빛이 더 영롱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침에 거실에서 소울밴드 '프랩(PREP)'의 경쾌한 <15th Floor>를 듣다가 흥겨워움에
나도 모르게 가볍게 춤을 추는데 아내가 익살스럽게 합류하는 바람에 댄스타임으로 휴일 첫날을 열었다.
연휴 후에 물량폭탄이 터지든 말든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의 자유로움과 흥겨움에 흠뻑 빠질 뿐이다. 자연스레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행복하게 흘러돈다.
택배 없는 날인 8월 14일은 래퍼인 막내아들 생일이다.
아들생일 3일 전이 힙합탄생 50주년이었다. 아들과 힙합 그리고 택배는 이래저래 얽히고설키는 인연이다.
아들의 생일, 힙합 탄생 50주년, 택배 없는 날. 이 모든 게 잘 버무려진 삼 일간의 휴일이지만 우리는 어디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삿말처럼 조용한 쉼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그동안 버거웠던 택배를 떠나서 무언가 상실한 그것을 본능적으로 찾고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에 나갈 건데 그냥 기분이 별로 안 나
(대신) 발코니가 있잖아 나만의 하늘 한 조각을 볼 수 있잖아
누가 문 두드리는 걸 들은 것 같은데 문밖에는 아무도 없네
Guess I've hit that time of life 아무래도 내게 딱 그 시기가 온 것 같아
When I need some quiet nights 조용한 밤이 필요한 시기 말이야
On my own 혼자만의 시간 말이야
Man, this city's too much for me 정말이지 이 도시는 내게 너무 버겁단 말이야
Too many cars to count them 셀 수 없이 많은 차들과
Too many days that look the same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은 날들과
Too many nights without you 네가 없는 밤들의 연속이야
It's a long way up to the 15th floor 15층까지 올라가는 건 먼 여정이야
아내와 함께 아들생일을 위한 케이크와 먹을거리를 준비하러 나왔다. 사람들이 막바지 피서를 즐기려 많이들 움직이고 있었다. 택배를 하고 난 이후부터는 굳이 어디로 떠나지 않고 집안에서 편히 쉬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집 나간 '외기러기' 큰아들도 우리 곁으로 오는 중이다. 흩어진 가족들이 한 곳에서 함께 하는 이런 시간들이, 밴드 '프랩'(PREP)이 그토록 찾고자 갈망하고 그리워했던 것들은 아닐까 싶어진다.
'쉼'과 '가족'이란 소중한 의미를 상실한다면, 15층까지 올라가는 과정조차도 힘겨운 긴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택배를 하는 동안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늘 10층, 15층을 올라가는 순간들은 늘 먼 여정처럼 여겨졌다.
도대체 무슨 상황들이 15층까지 가는 거리조차 이리도 힘겹게 만드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는 7,80년대 아파트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로세로 약 1.4m 폭의 좁은 공간에 성인 11명 정도가 수직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낯선 타인들과 약 1~2분간 함께 이용하는 공유재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이 계단으로만 이용가능한 한 아파트 내 고층상가동이 SNS에서 건강을 위해 좋은 핫플레이스로 크게 주목을 받았지만 택배기사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은 아찔하기만 하다.
최근에 배송하는 아파트단지에 정전이 발생하여 하루종일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배송을 하는 우리도 비상이었지만 우체부아저씨, 고령의 입주민 분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저층의 상품은 계단을 통해 배송하고 부피가 작은 상품은 편지함에 넣고 안내문자를 반복해서 보내야 했다.
무겁거나 부피가 큰 상품은 부득이하게 경비실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경비실에 가보니 다른 택배사 상품들로 이미 가득 차있었고 경비아저씨들도 당혹스러워하셨다.
사정해서 간신히 경비실에 맡긴 후 안내문자를 드린 고객분들에게서 걸려온 항의전화에 해명하느라 배송이 많이 지체되어 버렸다.
"무거운 상품을 거기다가 두시면 어떻게 해요?"
"죄송하지만 정전이라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 돼서 그러니 경비실에서 상품을 찾아가셔야 할 것 같네요. 양해부탁드려요."
상품이 걱정도 되고, 불편해하는 고객들의 반응도 신경이 쓰이지만 고층으로 무거운 상품들을 부실한 무릎으로 계단으로 배송하기에는 무리한 상황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 엘리베이터가 온전히 가동되는 다른 아파트단지에서 배송할 때는 저절로 감사해진다.
엘리베이터는 택배기사의 무릎과 관절을 살려주는 참 고맙고 살가운 존재다.
엘리베이터마다 열리고 닫히는 순간이 미세하게 차이나는 특징과 시간차를 지녔다. 숙련된 택배기사는 엘리베이터의 특성들을 잘 파악해서 각기 달리 열리고 닫히는 순간에 맞춰 배송을 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줄여나간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약 20초간 형성되는 폐쇄된 공간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호러나 공포, 은밀한 색다른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실상은 알지 못하는 타인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잠시 동행하면서 어색하고 불편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묘한 곳이기도 하다.
유난히 커버가 닳은 닫힘버튼의 상태는 무수히 많은 조바심의 손길들이 난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엘리베이터에는 은밀한 차별과 갈등적 상황이 생겨나기도 한다.
언젠가 배송할 짐을 가득 싫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완장찬 청소미화원이 고압적으로 막아섰다.
입주민이 아닌 택배기사나 배달기사들은 다른 엘리베이터(화물칸 전용)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손상되거나 더러워지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나름 항의를 했지만 막무가내로 관리사무소 방침이라고 했다.
폐쇄된 공간에서의 범죄를 우려해서 1층 로비층의 엘리베이터 버튼 위에 모니터가 설치된 아파트단지도 있다.
엘리베이터 특성상 수많은 이들이 함께 이용을 하기에 모니터에는 그런 모습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문제는 닫힘 버튼을 난타하던 조급함과 분노가 담긴 시선들이 모니터를 통해 이용자에게 고스란히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배송을 마치고 1층에 내려오니 기다리던 배달기사가 급히 탔다. 아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배달기사가 모니터를 통해 배송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욕을 해서 걱정이 돼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들 바쁘고 여유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입주민, 택배기사, 배달기사들이 닫힘 버튼과 짜증의 시선들을 주고받는 상황들이 소리 없는 전쟁처럼 매일 벌어진다.
한동안 뉴스에서 어느 상가의 엘리베이터의 닫힘버튼에 '압정'이 붙여진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다들 압정을 붙인 CCTV속 헬멧 쓴 배달기사의 이해할 수 없는 엽기적인 행동에 분노했지만 <닫힘버튼 위에 붙여진 압정>은 엘리베이터
내에서 발생하는 이기적인 차별과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이었다.
미국의 법의학자 '마이클 헬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자신의 소유권만을 주장하며 서로 간의 협력을 외면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가진 소유권은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손해를 입는 비극적 상황이 초래된다고 경고하며 이를 <반공유재의 비극>이라고 했다.
하지만 닫힘버튼으로 배려가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같이 탔지만 먼저 내리면서 남아 있는 이를 위해 닫힘 버튼을 슬며시 누르고 내리는 누군가의 모습에서 따스한 배려가 느껴진다.
엘리베이터가 짧게 열리고 닫히는 순간 급하게 배송하려 할때 열림버튼을 누르며 기다려주는 입주민의 모습에 저절로 감사하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서로 배송이 겹쳐진 경우 배달기사에게 계산이 된 것이면 배송해 줄 테니 달라는 나의 말에 웃으며 고마워한다.
택배란 원하는 상품을 문 앞까지 배송받는 편리한 권리이다.
서로를 배려하려는 작은 행동들은 그러한 권리를 더욱 편리하고 유용하게 강화시키며 엘리베이터
의 닫힘 버튼 위에 붙여진 날카로운 적대감이 저절로 사라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된다.
그리고 15층까지 올라가는 긴 여정같은 심리적 부담감도 덜어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