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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 맨몸 택배.

와비사비 라이프와 택배.

by 코나페소아


캘리포니아에 있던 집이 산불에 모조리 타버렸다.

모든 것들이 다 타버린 상황에서 유명잡지사 총괄 PD인 '줄리 애덤스'는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물건들이 나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게 되었다.


물건은 누군가에게 칭찬받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보조용품일 뿐이다.

물건은 아주 잠시 우리 곁을 머물 뿐 금방 사라진다.

부족함에서 미를 찾는 자세는 물건에 대한 관념 자체를 바꾸어주었다.


그녀는 부족함에서 만족을 느끼려는 자세를 삶의 중심에 놓고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으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려면 어떤 부분은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마흔에 창업을 하고 사무실을 얻었다. 각종 사무용품과 장비들이 아기자기하게 정리되고 사장실에 앉아있는데 꿈만 같았다. 오랫동안 꿈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조금씩 확장되는 사무실공간과 직원들은 세상을 향한 나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순간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 년 가까이 이것들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했다. 불 꺼진 사장실에서 늦은 시간 동안 절망하며 홀로 앉아있었다. 폐업신고서를 내니 5분도 안되어 처리가 되었다. 삼 년간의 모든 수고와 애쓴 모든 것들이 한순간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나를 한껏 고양시켜 줬던 사장이라는 직함도, 자랑스러운 사무실도, 든든했던 직원들도 모두 사라져 버리자 나는 골방에 드러누워 몇 개월을 공황장애와 같은 절망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인생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가 없으며 하나를 움켜쥐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프게 경험해야만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안전해 보이는 베란다가 아니라 불붙은 출입문이다. 부족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의미를 나름 불붙은 출입구로 달려가는 행위와 같다고 해석한다. 본능적 상식과 두려움을 누르는 또 다른 차원의 용기가 필요하다.


살면서 곧 사라질 물건이나 지위나 명예보다 단순하고 부족함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자세는 무의미해 보여 거부감이 들지만 마주친 지옥 같은 상황들을 벗어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해 준다.


겉치레보다는 삶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현명한 처신이다. 그런 삶은 우리의 마음을 한결 평온하고 여유롭게 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버리고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덜어내고 비우니 더욱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 집도 주변도 삶의 방식도 단순해지니 내면 또한 단순해져 모든 일에 판단이 쉬워진다.


먹고사는 문제도 단순할수록 좋다.


하나를 얻고 싶으면 하나를 내려놓듯이 삶을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맨몸으로 택배를 하는 삶은 지극히 단순하다. 하지만 단순할 것 같은 택배도 점점 복잡해지려 했다.




명절을 앞두고 쏟아지는 물량을 받으며 한창 바쁘게 작업 중인데 '스캐너'가 고장 나버렸다.


스캐너란 택배박스에 붙여진 송장 바코드를 읽어내는 휴대용 기계이다. 스캐너를 통해서 스마트폰에 입력된 정보를 고객에게는 알려주고, 택배기사는 그날 배송된 물량의 수량을 인정받는다. 스캐너가 없다면 택배시 곤란한 문제가 많이 생긴다.


내가 쓰는 모델은 구형(kdc250)인데 당시 구입가가 약 20만 원에 육박하는데 하지만 기기 내구성에 문제가 많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여분으로 하나를 더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오래돼서 교체해야 할 시기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요즘 신형스캐너 '하니스'가 호평이긴 한 것 같던데 역시나 내구성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택배란게 맨몸으로 상품하나 달랑 들고 배송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이런저런 장비들이 많이 필요하다.


스캐너, 휴대용 프린터, 스마트폰, 휴대용 대차, 이어폰, 바디캠 등등.



이 같은 택배기사들이 쓰는 장비들은 대부분 고가인데 자가구입해서 쓸 수밖에 없다. 수리를 맡기고 교체하는 모든 비용을 오롯하게 택배기사가 부담해야 하는데 거친 작업환경 때문인지 교체주기는 1년 내지 2년에 한 번으로 꽤 잦은 편이다.


이 대목에서 만일 <택배용품 렌털장비 대여업>이나 그와 관련된 보험들은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택배사나 대리점과 연계해서 비용은 안정적으로 수령하고 대신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AS 하는 <택배전문기기 대여업체>나 비용을 보조하는 보험상품이 생긴다면 수요층인 택배기사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을 듯싶다.


최근에는 한 가지 부담이 더 생겨났다. 2023년 올해 하반기부터 1톤 포터, 봉고가 전면 생산중단이 되고 전면교체된 신형모델이 나온다고 한다. 기존의 디젤형 택배차량도 2030년까지 모두 전기차 등 친환경모델로 전면 교체한다는 기사도 최근에 자주 나오는 걸 보니 택배차량 교체에 따른 만만찮은 비용부담이 예상된다.


하지만 택배의 현실은 사람도, 차량도 쉬거나 정비할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늘 불안하다. 이런 상황에서 택배기사는 택배차량이 고장 나서 퍼질 때까지 멈출 수가 없고 스캐너와 스마트폰이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 택배기기 들과 차량을 살살 달래 가며 배송할 수밖에 없다.



택배가 점점 총알배송, 로켓배송 등등 배송의 당일치기 속도전으로 치달려갈수록 시설투자에 열을 올리는 택배사들만큼이나 택배기사들도 개별적으로 맨몸으로 택배 하던 것에서 온몸에 이런저런 최신장비가 추가되어 간다.


이런 장비 구입에 따른 비용적 부담도 가중되어 간다. 차량부터 개인장비까지 택배의 속도전과 기후변화정책에 맞춰 추가되고 바뀌어가면서 단순한 '맨몸' 택배에서 복잡한 '장비'와 '시스템' 택배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점차 괄목하게 발전해 가는 것 같지만 자꾸만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바쁘게 첨단화로 향하는 시스템은 거대하고 견고해서 탄력적이지 못하다.


사소한 변화나 균열 앞에 무기력하고 먹통이 되는 취약성을 드러내다 종국에는 부서져버릴 것만 같다.


맨몸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요즘은 스마트폰과 스캐너가 고장 나면 택배를 못한다고 여기게 된다. 편의성과 효율성을 위해 이런저런 장비와 시스템을 추가할수록 택배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비용적 부담만 가중된다.


문득 영화 <리얼스틸>이 생각난다.

한 퇴물복서가 아들과 함께 구형로봇 '아톰'을 데리고 세계최강 로봇 '제우스'에게 도전을 한다. 이런저런 고전 끝에 막강한 시스템과 자본이 투여된 무적의 '제우스'를 마구 두들겨 고철을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 떠오른다.


관객들은 이런 반전의 상황에 열광하며 구형로봇 아톰을 일방적으로 응원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 역시 그런 관객 중에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맨몸의 택배기사가 구형장비를 가지고 거대한 자본과 물류시스템으로 무장된 거대한 독점적 세력들을 상대로 영화처럼 유쾌한 '업셋'은 실현 불가능한 걸까?.





아파트 근처(반경 3km)에 새로운 대형 식자재마트가 생겼다. 신규 아파트단지들이 조성되면서 상권도 하나씩 생겨난다. 쉬는 날,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곳에도 대형 식자재마트가 있지만 거의 독점분위기라 상품의 가격이 다소 비싼 느낌이다. '샤인머스켓' 2kg가 거의 삼만 원 정도 한다. 새로 오픈한 대형마트에서 '오픈 빨'인지 모르겠지만 9,900원에 판매했다. 오픈한 지 한 달이 다되어가는데 연일 주차장은 손님들로 늘 북쩍인다.


그런데 초롱이가 시동이 안 걸린다. 요즘 몇 차례 시동이 잘 안 걸리더니 오늘은 아예 먹통이다. 택배차 포리를 타고 장을 보러 갈 수도 없고 그만 발이 묶여 버린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산책하듯 단지 내 마트로 장을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초롱이는 2011년도에 신차로 구입한 경차인데 햇수로 12년이 다되어간다. 그런데 주행거리는 5만 km밖에 안된다. 하지만 연식이 오래되니 요즘 들어 손볼 일이 자주 생겼다. 이젠 작별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사실 초롱이와는 몇 번 헤어질 뻔했다. 힘든 시기에 팔려고 생각했으나 그때마다 가족의 발이 묶일 것 같아 생각을 바꾸곤 했다. 경차라서 세금이나 보험료 등 유지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아들이 함께 택배를 하면서 택배지원용으로 쓰면서 일상 및 레저용으로 겸용해서 쓸 화물밴을 구입하고 싶어졌다. 그리되면 초롱이가 애매해진다.


요즘 물질주의 풍조와 소비의 시류는 자꾸만 정든 '초롱이'와 '포리'를 바꾸고, 버리라고 강요한다.

납득이 될만한 부담을 지며 살아가고 싶은데 말이다.


유행의 뒤처진 낡은 공간이나 물건에서 평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과소평가했던 순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방식이다.


겉보기에만 치중한 것들을 버리고 다른 것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하고 매사에 여유가 생긴다.


오래된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부족함 속에서 만족을 찾아내며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싶다.


좀 더 빠르게 , 점차 첨단화되며 거대해져만 가는 물류시스템 속에서 단순하고 부족한 맨몸 택배를 한다는 의미는 곧 사라질 물질과 장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상품을 정성껏 전달하는 택배의 본연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소모품이 아니라 마음 편하게 택배를 오래 하는 택배기사로서 존재가치를 지킬 수 있을 것만 같다.


낡은 구형로봇 아톰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아들 맥스의 눈길에서 새로운 반전이 시작되었듯이 내 삶 속의 완벽하지 않고 무심했던 것들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


지금 내 몸에는 전날의 힘겨운 속도전 택배의 통증흔적들로 한가득이지만 곁에 아내가 있어, 가족이 있어 행복하다.


그런 소중한 가족을 지켜주는 택배라서 감사하다.


오늘도 어두워진 이 새벽에 언제나처럼 맨몸으로 떨쳐 일어나 손때 묻은 구형포터 포리와 함께 힘차게 택배 하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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