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삼촌 Jul 20. 2024

낮달

삶의 의미는 뒤엉킴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택배송장 위 글씨들이 너무나 작다.

배송할 때 주소를 제대로 읽지 못해 잘못 배송하는 등 실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택배기사들은 유성펜으로 주소를 다시 큼지막하게 옮겨 쓴다. 흘러오는 크고 작은 상품들을 간이책상 위에 가즈런히 놓고는 주소를   아내의 모습이 공부하는 학생 같기도 하고, 글을 쓰는 작가 같기도 .


온몸으로 글을  우리는 그렇게 인생을  내려가고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떨구어진 삶의 어느 한지점에서 와닿는 의 의미를 쫏아 육신을 도구 삶아 세월의 허공 위에 부지런히 우리만의 글을 써내려 가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제 존재를 드러내려 수만 번의 '몸글'들을 쓰고 또 써 내려간다. 읽어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쓰는 족족이 시간의 허공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려도 삶의 제 흔적을 남기려는 동동거림은 결코 멈출 수가 없다.


은은한 조명이 비취는 잘 꾸며진 서재의 책상 위에서 글을 쓸 때면 영혼을 맞바꾸듯 내면을 쥐어짜 내는 고역은 피할  없다.


고통이라는 실뭉치 에서 생각의 실, 감정의 실, 문체의 실 한 올 한 올씩 뽑아 올리며 간신히  문장씩 완성해 나간. 


글이란 자신의 경계 파괴하고 낯선 미지의 영역으로 나서려는 이의 앞에 펼쳐진 험난한 여정으로 이끄는 길이.

글 쓰는 이는 고통과 아픔 보듬고 걸어야 하는   위에서 또 다른 분신을 잉태하고 출산한다.


그래서일까. 분주함 속에서 분출되는 육체적 고통과 매 순간 생성되는 감정 맞부닥치는 노동 치열한 현장 속에서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렁이는 글머리의 뭉클거림이 한층 더 렬하게 와닿 다.


먼지와 소음, 그리고 땀과 통증으로 뒤범벅이 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뇌리에 선명하게 들어박히는 무수한 의 편린들을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수히 생겨난  나의 소중한 삶의 흔적들이 하나씩 의식의 깊고 어두운  건너편으로 아스라이 스러져간다.

   

글 속에 오롯하게 담아내고픈 소중한 삶의 의미란 아름다운 책상 위가 아니라도 먼지와 소음이 허옇게 흩날리는 택배현장 속에서도 그렇게 '낮달'처럼 하얗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낮달'을 처음 목격한 그때의 생경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밤과 낮이,

밝음과 어둠이,

흑과 백이,

혼돈된 형태로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낮달'은 그렇게 우리의 고정관념을,

좁디좁은 의식세계를 마음껏 흔들어 버리고는 한동안 마음을 싱숭생숭하고도 잔잔한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낮달'과 같은 존재다.

누구나 가슴속 깊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을 지닌 채 기 때문이다. 어둠과 밝음이 동시에 혼재된 '낮달'과 같은 존재로 말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선함을,

약한 자 앞에서는 악함을 선택적으로 분출하며 시시각각 교묘하게 다른 모습으로 약육강식 하는 살벌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등한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채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택배를 하면서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생생하게 겪어보니 그런 생각은 확신이 되어버렸다.


아침 까대기 시간에 나이 많은 H형님이 전날 택배하다가 '귀인'을 만난 이야기를 해줬다.


배송 중에 삼십 대 새댁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먼저 내리게 한 다음 배송을 하려고 층수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런데 새댁이 조심스레 올라가시면서 배송하셔도 된다고 말을 하더란다.


자신이 아는 오빠도 택배를 한다며 고생이 많으시다며 덕담도 건네는데 H형님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감동했다고 한다. 일전에 형님은 배송 중에 야박한 입주민을 만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기적이고 억지스러운 사람을 만나 '부아'가 나고 속상했던 심정이 하고 이해심 많은 귀인을 만나니 한없이 고맙다 못해서 감동이 되었다. 


자그마한 배려에도 눈물겹도록 감사해지는 이유는 세상에 판치는 이기심과 악함이 존재하기 때문다.


인생 속에서 '낮달'이 뜨고 지는 순간들이 또 있다.


노동의 힘겨움이란 이런 거구나. 택배를 한지 오 년이 다되어가지만 여전히 힘겹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가 느껴지는 고비를 매번 느끼며 택배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롭게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


아내와 함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을 때마다 우리는 놀라곤 한다.

집에서 먹던 똑같은 밥과 반찬이지만 일하면서 먹는 밥맛은 왜 이리 달고 맛있는 걸까. 

짧은 시간, 은 포터 안에서 하는 지극히 불편한 식사이지만 연신 '꿀맛'라며 아내와 나는 감탄하며 식사를 했다.

  

6일간의 힘겨운 택배 후에 맞이하는 휴일은 죽음처럼 치명적이게 달콤했다.

주 5일 근무하며 누리던 이틀간의 휴일에서 결코 느껴보지 못한 달콤함과 자유함이 있었다. 휴일아침 눈을 뜨는 순간 창문을 통해 비취는 아침햇살이 그렇게 감미롭고 감사할 수가 없다. 아내와 함께 마시는 커피 향과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의 시간들이 얼마나 삶의 활력이 되는지를, 휴일 저녁때면 "벌써"라며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아쉬워할 만큼 그렇게 즐기고 있었다.


삶이 지닌 두 얼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의 힘겨움이 평범했던 입맛을, 무미건조했던 휴식의 의미를 되찾아줬다.

잔혹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 뒤의 또 다른 상냥한 모습은 사람을 한없이 더 그리워하게 만든다.


삶의 의미란 늘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정한 한계와 울타리 너머에 존재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인 '낮달'처럼 때론 모순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모호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혼란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생이란 알 수도 없고 이해되지 않아도 살아내야 하는 건가 보다.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진다.


'낮달'은 사실은 늘 우리 곁에 하얗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태양빛에 가려져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보이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삶은 의미가 있으리라는 '믿음'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슈퍼마켓 플라워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