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들은 유성펜으로주소를 다시큼지막하게 옮겨 쓴다.흘러오는 크고 작은 상품들을간이책상 위에 가즈런히 놓고는 주소를 쓰는 아내의 모습이 공부하는 학생 같기도 하고,글을 쓰는 작가 같기도하다.
온몸으로 글을 쓰듯우리는 그렇게인생을써내려가고있었다. 부지불식간에떨구어진 삶의 어느 한지점에서와닿는 생의 의미를 쫏아 육신을 도구 삶아 세월의 허공 위에 부지런히우리만의글을써내려 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사는 동안 제 존재를 드러내려 수만 번의 '몸글'들을 쓰고 또 써 내려간다. 읽어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쓰는 족족이 시간의 허공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려도 삶의 제 흔적을 남기려는 동동거림은결코 멈출 수가 없다.
은은한 조명이 비취는 잘 꾸며진 서재의 책상 위에서도 글을 쓸 때면영혼을 맞바꾸듯 내면을 쥐어짜 내는고역은피할 수 없다.
고통이라는털실뭉치속에서생각의 실, 감정의 실, 문체의 실 한 올 한 올씩뽑아 올리며간신히한문장씩완성해 나간다.
글이란자신의 경계를파괴하고낯선 미지의 영역으로 나서려는 이의 앞에 펼쳐진험난한여정으로 이끄는길이다.
글 쓰는이는고통과 아픔을보듬고걸어야 하는그길위에서또 다른 분신을잉태하고 출산한다.
그래서일까.분주함속에서분출되는 육체적 고통과 매 순간생성되는감정들이맞부닥치는 노동의치열한현장 속에서 나는글을 쓰고싶다는욕망이,일렁이는 글머리의뭉클거림이한층 더강렬하게 와닿곤했다.
먼지와 소음, 그리고 땀과 통증으로 뒤범벅이 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뇌리에 선명하게 들어박히는 무수한생각의 편린들을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무수히 생겨난 나의 소중한 삶의 흔적들이하나씩의식의깊고 어두운저건너편으로 아스라이 스러져간다.
글 속에 오롯하게 담아내고픈 소중한 삶의 의미란 아름다운 책상 위가 아니라도먼지와 소음이 허옇게 흩날리는 택배현장속에서도 그렇게 '낮달'처럼 하얗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낮달'을 처음 목격한 그때의 생경했던감정이되살아난다.
밤과 낮이,
밝음과 어둠이,
흑과 백이,
혼돈된 형태로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낮달'은 그렇게 우리의 고정관념을,
좁디좁은 의식세계를 마음껏 흔들어 버리고는 한동안마음을싱숭생숭하고도 잔잔한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낮달'과 같은 존재다.
누구나 가슴속 깊이 서로 다른 두 얼굴을지닌 채 살기 때문이다.어둠과 밝음이 동시에 혼재된 '낮달'과 같은 존재로 말이다.
강한 자 앞에서는 선함을,
약한 자 앞에서는 악함을 선택적으로 분출하며 시시각각 교묘하게 다른 모습으로약육강식 하는살벌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등한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채 태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택배를 하면서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생생하게 겪어보니 그런 생각은 확신이되어버렸다.
아침 까대기 시간에 나이 많은 H형님이 전날 택배하다가 '귀인'을 만난 이야기를 해줬다.
배송 중에 삼십 대 새댁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먼저 내리게 한 다음 배송을 하려고 층수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그런데 새댁이 조심스레 올라가시면서 배송하셔도 된다고 말을 하더란다.
자신이 아는 오빠도 택배를 한다며 고생이 많으시다며 덕담도 건네는데 H형님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감동했다고 한다. 일전에 형님은 배송 중에야박한 입주민을 만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기적이고 억지스러운 사람을 만나 '부아'가 나고 속상했던 심정이 착하고 이해심 많은 귀인을 만나니 한없이 고맙다 못해서 감동이 되었다.
자그마한 배려에도 눈물겹도록 감사해지는 이유는세상에 판치는 이기심과 악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속에서'낮달'이뜨고 지는순간들이 또 있다.
노동의 힘겨움이란 이런 거구나. 택배를 한지 오 년이 다되어가지만 여전히 힘겹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가 느껴지는 고비를 매번 느끼며 택배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롭게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들이 있다.
아내와 함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먹을 때마다 우리는 놀라곤 한다.
집에서 먹던 똑같은 밥과 반찬이지만 일하면서 먹는 밥맛은 왜 이리 달고 더 맛있는 걸까.
짧은 시간,좁은 포터 안에서 하는 지극히 불편한 식사이지만 연신 '꿀맛'이라며 아내와 나는 감탄하며 식사를했다.
6일간의 힘겨운 택배 후에 맞이하는 휴일은 죽음처럼 치명적이게 달콤했다.
주 5일 근무하며 누리던 이틀간의 휴일에서 결코 느껴보지 못한 달콤함과 자유함이 있었다. 휴일아침 눈을 뜨는 순간 창문을 통해 비취는 아침햇살이 그렇게 감미롭고 감사할 수가 없다. 아내와 함께 마시는 커피 향과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의 시간들이 얼마나 삶의 활력이 되는지를, 휴일 저녁때면 "벌써"라며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아쉬워할 만큼 그렇게 즐기고 있었다.
삶이 지닌 두 얼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의 힘겨움이 평범했던 입맛을, 무미건조했던 휴식의 의미를 되찾아줬다.
잔혹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 뒤의 또 다른 상냥한 모습은 사람을 한없이 더 그리워하게 만든다.
삶의 의미란 늘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정한 한계와 울타리 너머에 존재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인 '낮달'처럼 때론 모순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모호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혼란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생이란 알 수도 없고 이해되지 않아도 살아내야 하는 건가 보다.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진다.
'낮달'은사실은늘 우리 곁에 하얗게 존재하고 있었다.다만태양빛에 가려져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보이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삶은 의미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