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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눈물길, 딸의 마음길

엄마의 눈물

"눈곱이 자꾸 낀다."

엄마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이 들면 그럴 수도 있지, 동네 안과 다니면 되겠지.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수원에서 유명하다는 이안과를 찾아갔을 때,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뚫어서 치료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의 눈물길이 막혀 고름이 차고, 그게 눈으로 밀려와 눈곱이 되었다는 것을.

3년 동안 엄마는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다"고만했다.


대학병원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수술 대기자가 밀려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엄마는 그 긴 시간을 묵묵히 참았다.

어제 입원했다. 오늘 수술이었다.

"눈 수술하면 당분간 앞을 못 볼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술 전날 밤,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가자고 했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15분에 천 원이었다.

병원에서 돈 버는 건 장례식장이 1위, 주차장이 2위라던 농담이 웃프게 현실이었다.

주차비가 아까운 게 아니라, 병원에 이렇게 자주 와야 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피곤할 텐데 가봐라. 자꾸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우리를 걱정했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 그게 우리 엄마였다.



수술은 3시간이나 걸렸다. 눈과 코로 관을 삽입하는 수술이었다.

둘째 날, 일을 마치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이 막 끝나고 병실로 이동하는 엄마와 마주쳤다.

"아파... 너무 아파..."

엄마가 운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양쪽 콧구멍에 관이 들어가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다.


나도 예전에 코 골절로 수술받았던 기억이 났다.

그 답답함, 그 고통을 나는 안다.


"코 수술하는 김에 콧대 높일까?"

그때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도 센데 콧대까지 높아지면 어떡해."

의사 선생님도 큰 변화는 없을 거라고 해서 그냥 뒀었다.

그런 농담이라도 할 수 있었던 그때가, 엄마 수술을 보며 새삼 그리워졌다.


"이번엔 내가 간호할게."

남동생이 말했다. 지난번 엄마 무릎 수술 때는 내가 한 달 가까이 병원을 오갔었다.

온 가족이 번갈아 가며 엄마를 돌봤던 그때에 비하면, 3일은 짧은 시간이었다.

남동생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 엄마를 지키고 싶어 했다.


엄마는 남동생 몰래 2만 원을 나의 주머니에 넣어줬다.

"밥 사 먹어라."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챙겼다.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한가 보다.


수술 후 추위로 몸을 떨고 있는 엄마의 다리를 계속 주물러줬다.


옆 침대에는 엄마보다 더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누워 계셨다.

"홍시가 제일 맛있어."

할머니가 말씀하시자, 그 딸이 대답했다.

"엄마, 홍시는 당이 높은 음식이라니까요."

"그래도... 홍시는 맛있어."

그 짧은 대화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나이 들어가는 부모, 걱정하는 자식, 그리고 작은 기쁨마저 조심스러워지는 현실.


이제 엄마는 나이가 들어간다. 병원 갈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건강이 제일 큰 재산이라고. 돈보다 건강이라고.

그런데 정작 엄마는 자신의 건강보다 우리 걱정을 더 한다.

주차비 걱정하고, 피곤할까 봐 집에 가라고 하고, 아픈 와중에도 나의 밥값을 챙긴다.


병실 창밖으로 가을 하늘이 보였다. 맑고 높은 하늘이었다.

엄마의 눈물길이 뚫렸으니, 이제 눈물은 제대로 흐를 수 있을 것이다.

아플 때 울어도 되고, 기쁠 때도 울어도 된다.


그런데 나는 안다.


엄마는 앞으로도 자신의 아픔은 숨기고, 우리 앞에서는 웃을 거라는 걸.

그게 엄마니까.

내일 아침이면 퇴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그 작아진 어깨를 보며 나는 다짐한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지켜야 할 차례라고.

엄마가 나를 키워준 것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 곁을 지키겠다고.

"엄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요. 이제 엄마도 울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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