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알바생의 이야기들
남편은 25년째 한 직장을 지키고 있다.
매달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승진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는 '유리봉투'의 삶.
안정적이지만 투명한 천장이 보이는, 그런 삶이다.
나는 다르다. 알바는 나의 직업 체험 놀이터다.
하고 싶으면 하고,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지루하면 떠나는 삶.
자격증 없어도 괜찮다.
오늘은 인구조사원, 내일은 고시원 청소, 모레는 행사장 도우미. 이게 바로 내 스타일이다.
문을 열면 시작되는 소소한 드라마들.
오늘 인구조사 교육에서 세무사 자격증을 소지하신 봉사를 놀이터라고 칭하는 언니를 만났다
"아니, 세무사면 사짜로 끈다는 직업은 돈을 많이 벌텐데
힘든 자격증을 가지고 계신 분이 , 왜 이런 일을..."
"에이, 사무실 운영이 쉬운 줄 알아요? 차라리 이렇게 걷는 게 건강에도 좋고, 사람 구경도 되고."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그 눈빛엔 자유가 있었다. 학력이나 자격증은 선택지를 늘려줄 뿐, 삶의 방식을 강요하진 않는다는 걸 배웠다.
"띠리릭~ 띠리릭~"
바코드 찍는 소리가 일상의 리듬이 된다. 옆 언니는 대학원까지 나왔다고 했다.
"공부 많이 했는데 여기서 일하니까 아깝지 않아요?"
"아깝긴 뭐가 아까워. 나 원래 연구실에서 논문 쓰다가 우울증 왔었어.
지금이 훨씬 좋아. 손님들 웃는 얼굴 보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러고 보니 이 언니, 단골손님들한테 인기 폭발이다.
"오늘은 배추가 싸요~" "이거 유통기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오늘 드세요!" 친절의 달인.
학력은 과거, 지금의 행복은 현재형이다.
알바 평점: ★★★☆☆
장점: 에어컨 팡팡, 앉아서 일할 수 있음
단점: 손목 터널증후군 주의, 진상 손님 출몰
시급: 최저시급
꿀팁: 단골손님 얼굴 외우면 일이 재밌어짐
"주문하신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이 식당 사장님은 특이하다. 건물 3채 가진 건물주인데, 매일 같이 홀 서빙을 하신다. 퇴근할 땐 벤츠를 몰고 가시지만, 일할 땐 우리랑 똑같이 땀 흘린다.
"사장님, 왜 이렇게 일하세요? 직원 더 뽑으시면 되잖아요."
"이게 재미있어서. 집에만 있으면 심심해 죽겠더라고. 손님들한테 맛있게 먹었다는 소리 들을 때가 제일 좋아."
아, 이게 바로 '삶의 원동력'이구나. 돈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시는 분.
알바 평점: ★★★★★
장점: 고급 음식 맛보기 가능, 팁 문화
단점: 피크타임 지옥, 드레스코드 힘듦
시급: 만원 중반대 + 팁
꿀팁: 단골 VIP 손님 잘 모시면 명절에 보너스 있음
"어서 오세요~ 주차권 찍고 가세요!"
주차장 관리 알바는 생각보다 꿀이다. 한가할 땐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뉴스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 이 주차장에서 일하시며 구두쇠처럼 사셨는데,
돌아가신 후 수천억 주차장 소유주이 있었다고..
"도대체 뭐 하려고 그렇게 모았대요?"
"글쎄... 쓸 줄을 몰랐나 봐."
돈을 모으는 것도 능력이지만, 쓰는 것도 능력이다. 삶을 즐기지 못하고 숫자만 쌓다 간 인생이 안타까웠다.
알바 평점: ★★★★☆
장점: 업무 강도 낮음, 혼자만의 시간
단점: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움, 무료함과의 싸움
시급: 최저시급 조금 상회
꿀팁: 단골 차량 번호 외우면 인간미 뿜뿜
대학교에서 방과 후 돌봄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 강의도 좋고, 현장 실무자들 이야기도 유익했다.
보육교사 친구들은 현장에서 더 잘하려고 배우러 왔다.
"언니도 이거 끝나면 현장 나가요?"
"나? 나 자격증 없어서 안 돼."
일자리는 넘쳐나는데, 이력서조차 못 낸다.
세 아이 키운 나보다 경험 없는 자격증 있는 갓 졸업생이 우선이다.
사회복지사? 청소년지도사? 고민만 하다가 시간만 흘러간다.
솔직히 내 아이 셋 키우는 것만으로도 돌봄 에너지는 바닥났다.
알바 평점: ★★☆☆☆ (할 수가 없음)
장점: 보람 있는 일, 안정적
단점: 자격증 없으면 문전박대, 감정노동 극심
시급: 만원 중반대
현실: 자격증 장벽, 도전의식 없음
"오늘 행사 끝나면 내일은 뭐 해?"
"몰라, 내일 생각하면 되지."
행사장 알바는 완전 하루살이 인생이다. 오늘은 제품 시연회, 내일은 전시회, 모레는 결혼식장. 매일 다른 곳, 다른 사람, 다른 이야기.
젊은 친구들은 투덜댄다. "취업이 안 돼요", "일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정작 이런 알바는 안 한다.
눈만 높아져서.
"오빠, 이거 아르바이트비 얼마예요?"
"12만 원."
"에이, 그것밖에 안 돼요? 패스~"
아, 젊음의 오만이여. 나중엔 이것도 못 할 나이가 온다는 걸 모르나 보다.
알바 평점: ★★★☆☆
장점: 다양한 경험, 사람 구경, 일회성이라 부담 없음
단점: 불안정, 체력 소모 큼, 인간관계 리셋
시급: 건당 5~15만 원
꿀팁: 행사업체 여러 곳 등록해 두면 일감 끊이지 않음
"어서 오세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세상이 잠든 시간, 편의점은 깨어있다.
새벽 2시에 라면 끓이러 오는 대학생, 야근 끝나고 맥주 사러 오는 직장인, 택배 기사님들의 간식 타임.
"아줌마, 여기 왜 나와요?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하긴. 근데 집에 있으면 더 답답해.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
밤에는 사람들이 더 솔직해진다. 낮의 가면을 벗고,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알바 평점: ★★★★☆
장점: 야간수당, 한가할 땐 공부 가능, 조용함
단점: 수면패턴 망가짐, 안전 문제, 취객 대응
시급: 최저시급 + 야간수당 50%
꿀팁: CCTV 많은 곳, 경찰서 가까운 곳 선택할 것
"드셔보세요~ 오늘 특가예요!"
마트 시식 코너는 전쟁터다. 특히 주말엔 더.
요즘 일용직 시장은 중국인, 베트남인, 필리핀인들이 장악했다. 한국말도 유창하고, 부지런하고, 임금도 저렴하다.
"언니, 우리 일자리 다 뺏기는 거 아니에요?"
"뺏긴다기보단... 우리가 안 하려는 일을 하는 거지."
맞는 말이다.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이제 외국인들 몫이 됐다. 우리는 그 사이 뭘 했을까?
알바 평점: ★★☆☆☆
장점: 서서 하는 일이라 운동됨, 남는 제품 가져갈 수 있음
단점: 발 아픔, 시식만 먹고 가는 사람들과의 멘털 전쟁
시급: 최저시급
현실: 외국인 근로자들과의 경쟁 심화
이 이야기는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알바를 하며 들었다.
간호조무사로 20년 일한 분이 있었다. 의사보다 수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집도의가 어려워하는 봉합도 척척 해냈다.
"자격증 따시지 그래요?"
"이 나이에? 의대 다시 갈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자격증이 없어도 실력은 있다. 하지만 법은 종이를 인정한다. 능력이 아니라.
이게 대한민국 자격증 사회의 민낯이다.
"일하면 수급 탈락이에요.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요."
일해서 월 100만 원 벌면 수급비 80만 원 끊긴다. 순수익 20만 원 때문에 의료급여, 주거급여 다 날린다.
이게 합리적인 선택일까?
"6개월 일하고, 실업급여 6개월 타먹기. 이게 꿀이지~"
실업급여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 진짜 실직자보다 더 똑똑하게 제도를 이용한다.
4대 보험 안 내려고 프리랜서 계약. 사실상 직원인데 서류상으론 용역.
회사도 좋고, 본인도 좋다. 국민연금만 손해.
남편의 유리봉투 인생도 괜찮다. 25년 세금 꼬박꼬박 내며, 가족을 책임지는 모습. 존경스럽다.
내 알바 인생도 괜찮다. 매번 다른 경험, 다른 사람, 다른 배움. 자유롭다.
20대는 얼굴로, 30대는 자식으로, 40대는 관계로, 50대는 학력 없이, 60대는 미모 없이, 70대는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자격 요건은 낮아진다. 역설이다.
젊을 땐 스펙을 쌓고, 중년엔 경험을 쌓고, 노년엔 그냥 버티는 것.
남과 비교하지 마라.
남편의 삶도, 내 삶도, 세무사님의 알바도, 건물주 사장님의 서빙도, 다 의미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선택한 삶'인가다.
우리는 모두 열심히 살고 있다.
유리봉투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격증이 있든, 없든.
건물이 있든, 월세살이든.
벤츠를 타든, 버스를 타든.
살아있다면,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인생은 알바다. 정규직은 환상이다."
아르바이트생 철학자,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