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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속 사랑의 미로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오늘 히치콕의 '현기증'을 다시 봤다. 스콧티가 매들린을 향해 손을 뻗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는 것들

스콧티는 매들린을 사랑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한 걸까?

그가 주디를 매들린의 모습으로 바꿔가며 집착했을 때, 그 광기 어린 시선 속에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결혼 20년차,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아줌마 처럼 말고 밝은색옷 입어"

"살 좀 빼면 안 돼?" "웃을 때 그렇게 웃어야지, 왜 이렇게 웃어?"

"머리는 생머리 길게 제발 단발머리 하지마"


어느 순간부터 그는 20대 나를 현재의 50대 에게서 찾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던 그 사람을, 가슴이 뛰던 그 순간을 지금의 30년이 지난 나에게

애쓰고 찿고 있었던 것이다.


매들린은 처음부터 없었다

영화 속 진실은 충격적이다. 매들린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디가 연기한 가짜였고,

스콧티는 허상에 사랑에 빠진 셈이었다. 그런데 진짜 비극은 그 다음이었다.

진짜 주디를 만났을 때도 그는 여전히 가짜 매들린을 원했다는 것.

이상하지 않나? 진짜가 바로 앞에 있는데 가짜를 그리워하다니.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 역시 지금의 남편이 아닌, 기억 속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년 전 그 청년의 모습을, 설레던 그 시절을 현재의 그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랑은 현기증이 된다

남편은 아침 거울 앞에서 배가 나온 자신을 보며 한숨을 쉰다.

나 때문일까? 내가 계속 "옛날이 좋았다"고 중얼거려서일까?


스콧티처럼 나도 모르게 그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주디가 매들린 옷을 입고 매들린 헤어스타일을 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주디였다.

20년 전 남편과 똑같이 입히고 꾸민다고 해서 그가 20년 전 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진짜 사랑을 찾아서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스콧티는 끝까지 환상을 놓지 못했다. 주디라는 진짜 사람보다 매들린이라는 가짜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현기증에서 깨어나기


마술의 주문을 걸어본다


"당신 옛날보다 더 멋있어졌어."


"진짜야. 20년 전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당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사람이었어."


'진짜 사랑'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매일 아침 나와 함께 일어나고, 내 손을 잡고, 나와 늙어가는 이 사람 속에 있다고............ 주문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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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들린은 환상이었지만, 주디는 실재했다. 20년 전의 그는 추억이지만, 지금의 남편은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이 더 잔혹하다.


현기증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생긴다고 했던가. 어쩌면 사랑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너무 높은 곳에 이상을 두고 현실을 내려다보려 하면 어지러워진다.

이제는 같은 높이에서, 나란히 서서 함께 바라보고 싶다. 앞으로의 20년을.




회색옷 입은 여자는 의자에 오래 앉아 이 사진을 보면서 무슨 주문을 걸고 있는걸까?

난 목걸이 갖고 싶다고

꽃다발도 받고 싶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러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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