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싸이월드 페이퍼 : 9화
페이퍼 작성 : 2006년 4월 6일 시간적 배경 : 2002년 12월 하순
사실 2002년 말에 대학원서접수를 할 때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는 전혀 지원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학교와 학과의 브랜드를 무시해서가 아니고 감히 넘볼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받은 수능점수는 커트라인에서 한참을 못 미쳤다.
대신 동국대 문창과보다는 커트라인이 낮은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군의 지원학교로 선정했다. 그렇게 원서접수 대행 사이트인 ‘유웨이’에 명지대를 지원하려고 했건만… 다음과 같은 안내 메시지와 함께 접수가 되지 않았다.
1980년생 이전 지원자는 직접 학교로 찾아와서
학생기록부와 각종 서류를 제출해야만 지원이 가능합니다.
- 명지대 입학관리처 -
나는 이 메시지를 지금도 납득할 수 없다. 80년생 이전은 무슨 사유로 인해 편리한 인터넷접수를 하지 못하고 굳이 명지대로 번거로운 발걸음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았으면 아마 나는 요구하는 서류들을 잔뜩 챙겨서 명지대로 달려갔을 것이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당시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객기가 발동했다. 이곳이 아니면 ‘나’군에서는 딱히 지원할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지대 지원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신 지원한 곳이 바로 동국대 문창과였다. 이러니 이곳에 별다른 합격의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당연했다. 그러나 운인지 실력인지 몰라도 덜컥 붙었다는 사실은 6화에서 이미 밝힌 바이다.
만약 명지대 입학관리처가 80년생 이전의 응시생도 유웨이 원서접수를 허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분명 난 명지대에 원서접수를 했겠지? 그리고 합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쯤 나는 동국대가 아닌 명지대 문창과 4학년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상상을 계속해 보자. 그랬다면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는 동국대를 놔두고 약수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무려 14정거장이나 가야 하는 증산역의 명지대로 통학했을 것이다. 거기선 어쩌면 여학우들이 날 ‘삼촌’ 대신 원래 호칭인 ‘오빠’로 불렀을 수도 있고 그곳에서 괜찮은 여성을 만나 사랑을 피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학교는 동국대 연극과처럼 나이가 많아도 들어온 기수로 따지기에 내가 새파랗게 어린 선배들에게 반말을 들었어야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만큼 학년이 올라가면 선배로서의 권위가 커져 ‘악명 높은 전설의 노땅 대학생’이라는 소문을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쩜 신춘문예 등단은 아직도 꿈에서나 이룰 법한 먼 미래진행형으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르고.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지금의 내 모습과 다른 그림들이 머릿속에 자꾸 펼쳐져 묘한 기분과 함께 즐거워지곤 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명지대는 날 버렸고 동국대는 날 받아주었다. 난 나를 버리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나 사람에겐 전혀 미련을 주지 않는다. 대신 날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아직까진 동국대 문창과가 날 필요로 하다고 여기기에 열심히 108명의 학생들 중 하나로 성실히 생활하고 있다.
(에필로그)
2007년 2월 졸업식에서 난 총장님이 주시는 공로상을 받았다. 그 해 문창과 졸업생들 중에서는 유일했다. 작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등단해서 학교와 학과의 이름을 빛냈다는 게 공로상 수여의 이유였다. 지금도 내 진열장에 놓인 여러 상패들 중에서 가장 크고 폼이 난다.
이런 상을 받길 원했던 건 아니지만 이를 통해 학교와 학과에 보탬이 되었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어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난 다른 이들처럼 졸업장만 받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제일 싫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았어.’
이게 내가 속한 어느 학교든 조직이든 간에 훗날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평가였다. 석사과정을 마친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는 이 점에서 2013년까지 떳떳하지 못했다. 조용히 석사학위만 받고 학교에서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서울산업대 재학시절 썼던 소설로 장편소설에 등단하고 ‘등단과 수상의 영광을 안은 자랑스러운 졸업생 명단’에 내 이름을 한 줄 올렸으니 나름 학과에 보탬이 되었던 학생이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