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생각
이십여 년 전 농장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농장은 버섯 농장이었고 한국인인 나 말고도 인도인,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와서 일을 하던 젊은 친구들이 함께였다. 그중 유독 내 주위에 머물며 나와 친해지려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친구였고,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다. 방학을 맞으면 임금이 다소 높았던 농장을 찾아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혼자 있고 싶어 하던 나의 곁에서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붙여왔고, 나는 일부러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녀는 갖은 이유와 핑계로 나와 가까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런 그녀가 하루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 너는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너희 나라에 가서 살면 너는 분명 여왕처럼 살 수 있을 텐데.."
한국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분명 여왕의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눈엔 내가 어지간히도 이상하게 보였었나 보다. 냉큼 답을 주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음 질문으로 말을 이었다.
" 혹시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숨어있는 거야?"
그녀의 예상치 못했던 진지한 그 질문에 나는 그만 빵 터져버렸다. 그동안 그녀의 머릿속엔 내가 지명수배자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복잡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녀가 귀엾기까지 했다.
"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아주 커다란 잘못을 하긴 했거든.."
나의 형편없는 대답에 순진한 그녀의 눈은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녀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 아주 큰 잘못...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잘못.. 내가 여러 사람 인생을 망쳐버렸거든"
그건 진실한 내 마음의 고백이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온 유학길에 덜컥 남자를 만나 아이를 가지고 그리고 또 그 남자를 피해 아이들을 첩첩산중 산골로 끌고 들어왔으니 하는 말이다.
어려서부터 서당의 훈장을 하셨던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소학을 배우며 자랐다. 지극히 유교적인 집안에서 여자로서 지켜야 할 내훈과 덕목을 배웠던 나로서는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나와 나의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의 인생을 동시에 망쳐버린 것이었다. 이것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그 후로 나는 시끄러운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비록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순진하던 그녀의 머릿속이 그녀의 입보다 더 시끄러웠음을 가끔 흘깃거리던 그녀의 눈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내가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과연 여왕처럼 살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