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어의곡-천동 코스
"서울에 있는 산은 난이도가 낮다"
"지방에 있는 산이 찐이다"
등산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다. 서울에 있는 웬만한 산은 가본 상태에서 저런 이야기를 보니 원정산행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원정 산행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단체버스, 일명 ‘안내버스’를 신청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등산로 입구에 내려주고, 하산지점에서 타고 이동할 수 있어 편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다. 내가 처음 선택한 안내버스의 목적지는 소백산.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 봉화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인데 삼재(화재, 수재, 풍재)가 들지 않은 산이라 하여 풍수의 명당으로 꼽힌다고 하더라. 여름, 겨울에 뛰어난 경치로 유명하지만 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고, 코스 거리와 난이도가 적당해서 예약했다. 어차피 가을엔 어느 산을 가든 멋있을 테니까.
등산할 날만 손꼽고 있을 무렵, 기상청이 잊고 있었던 점을 상기시켜 줬다. 벚꽃, 단풍이 절정인 시기엔 비도 자주 내린다는 사실이다. 기상청 날씨를 확인하니 등산가기로 한 날에 전국적으로 비가 잡혀 있었다. 날짜가 코앞이라 취소하면 수수료가 비싸니 우천취소 되길 바랐지만, 생각보다 우천취소 조건이 까다로웠다. 전날 공지 문자가 왔는데 기상청 산악날씨에 오전 11시까지만 비 1mm 미만으로 내린다고 하니 취소 안 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백산으로 가는 당일, 새벽에 일어나 단체버스 탑승을 위해 사당역으로 이동했다. 일요일 아침 6시 반에 사당역 근처는 안내버스를 기다리는 등산객으로 붐볐다. 주말에 관악산 사당코스를 가는 날이면, 사당역에 있는 수많은 등산객을 보며 ‘이 사람들이 전부 관악산으로 향하는 건 아닌듯한데 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날 사당역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안내버스를 보고서야 답을 알 수 있었다. 버스 탑승객 중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온 부모도 있었다. 날도 안 좋은데 괜찮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들도 가는데 내가 날씨 핑계로 안 가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단양에 도착하니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 탈 때부터 어느 정도 체념한 상태였기에 일기예보대로 11시까지만 내리길 바라며 10시 반쯤 버스에서 하차했다. 안내버스 측에서 배포해 준 코스는 어의곡에서 비로봉, 천동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으로 오후 5시 반까지 집결해야 했다. 이용자 리뷰엔 시간이 넉넉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지만, 처음이라면 간당간당하다는 말도 있어 속도를 내어 올라갔다. 비 때문에 산 입구에서부터 안개가 있기에 정상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겠구나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비는 11시를 지나 12시 넘도록 그칠 기미가 없었다. 올라가는 도중에 오히려 더 많이 내리기도 하고, 안개는 짙어졌다.
사전조사할 때 소백산은 일명 ‘똥바람’으로 유명하여 바람이 많이 불고, 비로봉은 많이 춥다는 후기가 많이
있었다. 후기대로 소백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 가까워지자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 옷을 챙겨가서 다행이었다. 등산로 입구에선 덥길래 괜히 짐만 되는 것 같아서 조금 후회했는데 없으면 큰일 날뻔했다. 사실 추위를 느끼고 나서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춥기 전에 미리 꺼내서 입어야 체온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론 알지만 등산 초보였던 시절이고, 낯선 지형과 안개로 인해 어느쯤에 입을지 감을 못 잡아서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날씨 때문인지 올라가는 길에 사람이 별로 안 보였는데, 정상석 주변에도 많지 않았다. 다른 등산객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시간을 확인했더니 오후 12시 50분. 정상까지 약 2시간 남짓 걸린 셈이다.
시간이 넉넉한데 바로 내려가긴 아쉬우니 비로봉 주변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오르락내리락했다. 운무로 시야확보가 잘 안 되는 상태에서도 비로봉 주변은 멋있었다. 감탄을 하면서도 ‘날이 좋았으면 얼마나 경치가 멋졌을까’하는 생각에 아쉬웠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무심코 한쪽을 바라봤더니, 바람에 운무가 이동하면서 주변 경관이 살짝씩 보이고 있었다. 잠시 드러난 산의 모습과 다시 산을 덮어버리는 운무의 움직임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장관이었다. 사진을 찍었지만 핸드폰 카메라로는 한계가 있었다. 대신 내 기억 속에 남을 수 있게 눈으로 열심히 모습을 담았다.
등산하면 산마다, 계절마다 각각의 매력이 있는 멋진 광경을 접하게 된다. 날씨가 맑으면 시야가 선명하게 보이고, 사진도 잘 나와서 좋다. 하지만 '살면서 이런 광경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날씨가 좋지 않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찾아왔다. 고생했기에 더 값지게 느껴진 것 같다.
하산길은 완만하고 긴 코스였다. 평소라면 반기지 않았겠지만 이 날은 예외였다. 길이 미끄러웠고, 빗물이 등산로 일정 구간에선 얕은 계곡처럼 통째로 흐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날 비는 오후 2시 넘어서야 완전히 그쳤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하산했더니 오후 4시 반. 비에 젖고 흙이 묻어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기분은 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