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청종주(광교산~청계산)
투지와 오기. 누군가 나에게 스스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스스럼없이 저 두 가지를 말할 것이다.
등산으로 체력이 좋아지면 자연스레 종주에 눈길이 간다. 종주 난이도는 코스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아무리 짧아도 20km 내외는 된다. 초보일 땐 관심이 없더라도 난이도를 점차 높이며 다니다 보면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등산을 반년 정도 했을 때 도전해 볼 생각이 들었다.
수도권에서 종주입문 대표코스를 뽑자면 단연 ‘광청종주’라고 할 수 있다. 광교산에서 시작하여 백운산, 바라산, 우담산, 청계산까지 5개 산을 거쳐 24km에 달하는 코스이다.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한 산들이라서 종주 중엔 난이도가 쉬운 편이다. 다만 이전까지 갔던 코스들은 12km 내외였기에 2배에 달하는 거리를 소화할 수 있을지 좀 염려되었다. 주변에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기에 등산 정보를 얻는 카페에 글을 썼다. 내가 다녔던 코스들을 나열하며 완주 가능할지 물어보니 댓글이 몇 개 달렸다.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응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눈에 들어오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해보세요. 광청종주는 중탈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유일하게 현실적으로, 냉정한 판단을 해준 댓글이었다. 종주코스 중엔 한 번 시작하면 중도 하산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는데, 광청종주는 가능하다는 정보도 함께 알려준 친절함까지 담겨있었다. 나쁜 의도로 남긴 댓글이 아닌 걸 알지만 읽자마자 왠지 모르게 오기가 생겼다. 꼭 성공해서 인증하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등산 당일 물과 이온음료를 충분히 챙겼고, 장시간 편한 움직임을 위해 트래킹화를 신은 채로 출발했다. 지하철로 광교역까지 이동하여 광교산을 향해 걸어갔다. 어플을 따라가기도 했지만, 종주코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중간중간에 등산객이 쓴 것으로 보이는 ‘광청종주’ 글자와 화살표 표시가 있어 초반엔 길 찾기 어렵지 않았다.
광교산을 지나 백운산, 바라산 등 하나씩 산을 넘어가는데 몇몇 사람들이 눈에 익었다. 분명 광교산에서도 본 사람인데 다른 산에서도 계속 보였다. 광청종주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
중반쯤 되었을 때부터 슬슬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특히 안내가 없는 갈림길은 난감했다. 고민 끝에 찍기 실력을 발휘해서 냅다 한쪽으로 갔는데 뒤에서 그쪽이 아니라고 말 거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줌마께서 “광청종주 하는 거 아니에요? 지난주에 제가 그쪽으로 갔다가 헤맸어요. 거기로 가면 안 돼요”라고 하셨다. 내 눈에 낯익은 사람들 역시 나를 알고 있었나 보다. 내 똥촉을 믿었으면 더 고생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탄한 경사는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경치가 좋으면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24km 구간동안 전망이 트인 곳은 3곳 정도뿐. 등산로 대부분 나무로 둘러싸여서 햇빛을 어느 정도 가려주니 체력소모는 덜했지만 지루했다. 8시간 넘게 비슷한 길만 가니 재미가 없었다. 단순히 체력적으로만 힘든 게 아니라 다른 의미로 힘들어서 탈주하는구나 싶었다.
한참 가다 보니 마지막 목적지인 청계산에 도착했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데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과 가는 길이 겹쳤다. 나를 제치고 휙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자 또 내 안의 투지가 불타올랐다. 뒤쳐지기 싫어서 속도를 내어 열심히 올랐다.
처음으로 20km 넘는 산행을 했더니 무릎보호대를 했음에도 막판엔 무릎이 아팠지만,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무릎이 아니었다. 여름 북한산 산행 때 심한 갈증을 겪은 기억이 있어서 지칠 때마다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해줬건만 그게 말썽이었다. 화장실이 간절한데 국립공원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가 발견 못한 건지 몰라도 가는 내내 화장실을 한 번도 못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번씩 주위에 사람이 없는 순간이 생길 때 혼자 갈등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급한 일을 해결할지 고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워낙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산이라서 그때마다 금방 사람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끝까지 존엄성을 지킨 채 하산을 완료했다.
등산로 입구에 화장실이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산한 곳은 근처에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지만 마땅치 않아 보였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만 했는데, 버스정류장조차 꽤 떨어져 있었다. 몇 km를 참으며 걸었는데 못 참을 게 있겠나 하며 도 닦는 심정으로 걸어갔다. 10분 남짓 기다리자 버스가 왔고, 가까운 지하철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평온을 되찾은 상태에서 집에 가는 길을 검색하니 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은 2-3분 이내, 다음 버스는 20분 뒤에 온다고 나와 있었다. 다리 아파서 걷는 것도 힘드니 다음 버스를 탈까 싶었지만 기다리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냅다 뛰어서 지하철역을 벗어났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계단까지 뛰어올라갔다. 다행히 버스보다 일찍 정거장에 도착해서 무사히 집에 돌아갔다. 이 날 최종 걸음수는 약 4만 8천 보를 기록하여 내 인생 최초로 4만 보 이상의 걸음수를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