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능선-문수봉-비봉
장마로 일주일가량 비가 내리던 시기였다. 주말이 다가오자 다행히 기상청 사이트에 토요일 흐림, 일요일 맑음으로 예보가 나왔다. 일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향한 곳은 북한산. 의상능선에 2번째로 도전한 날이었다. 도봉산에서 러브버그에 질린 이후 한동안 북한산 주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7월 중순이 지나자 러브버그가 사라졌다는 후기가 있어서 안심하고 향했다.
6월엔 의상능선만 갔지만 똑같은 코스를 가는 건 재미없으니 7월엔 난이도를 업그레이드했다. 의상능선으로 시작해서 문수봉, 사모바위, 비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잡았다. 한여름이라서 그런지 6월과 달리 북한산으로 향하는 버스는 한산했고, 등산로 입구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후기대로 러브버그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내린 비 때문인지 벌레 자체가 별로 없었다. 6월엔 파브르 곤충기 실사판을 보는 것처럼 온갖 벌레를 목격했는데 7월 말엔 거미, 파리, 모기 정도만 가끔 보였다.
날이 습해서 시작하자마자 몸이 축 처졌다. 이 날도 ‘내가 미쳤지’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의상능선의 가파른 경사는 다시 가도 쉽진 않았다. 게다가 비가 덜 말라서 바위가 젖은 곳이 많았고, 등산화를 신었음에도 올라가는 길에 몇 번 미끄러졌다. 까딱하면 골로 가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건 내가 아직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 딱히 안 좋은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당장 삶이 끝나더라도 크게 하고 싶은 것도, 미련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위험한 순간이 닥치니 바위를 꽉 붙들고,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삶에 대한 집착과 의지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의상능선을 거쳐 문수봉에 다다랐을 때, 처음엔 길을 찾은 줄 알았다. 경사가 도봉산 와이계곡 못지않게 가파른데 잡을 것도 없이 내려가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초보라서 이런 길에 능숙하지 않았기에 난감했다. 등산객이 많으면 앞사람 따라서 가면 되는데 하필 그 순간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길이 맞는지 어플 gps를 확인하느라 멈춰 있으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두어 명이 보였다. 길을 제대로 잡았음을 확신했지만 비에 젖은 바위 때문에 막막했다. 의상능선은 그나마 올라가는 길이라 괜찮았지만 내려갈 자신이 업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자니 미끄러운 의상능선을 내려가야 해서 진퇴양난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아저씨가 나를 지나쳐 내려갔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뒤따라갔다. 천천히 신경 써서 갔는데 거의 다 내려갔을 때 결국 미끄러져서 넘어졌다. 다행히 도착 직전이라 높이가 높지 않았기에 다치진 않았다. 바위 위라서 좀 아팠을 뿐이다. 넘어지며 낸 소리에 앞서가던 아저씨께서 괜찮냐 물어보시더니 그 뒤로 안전한 곳에 다다를 때까지 내려가는 내내 한 번씩 뒤돌아보며 살피고, 곧 미끄러운 데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야기해주는 등 신경 써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상능선~문수봉 구간은 쉬운 코스와 어려운 코스가 있는데 내가 간 곳은 어려운 코스였다.
잠시 평탄한 구간이 나왔지만 또 경사 구간이 시작되었다. 난간을 붙들고 천천히 내려가는데 심박수가 떨어지자 어플에서 내가 쉬는 줄 알고 자꾸 휴식모드로 전환되어 억울했다. 등산어플 gps에 의존해서 길을 찾아가는데 코스가 그런 식이니 핸드폰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비봉으로 넘어가는 길을 찾다가 앞에 또 다른 아저씨께서 먼저 가는 걸 보고 냅다 따라갔다. 한참 따라가는데 아저씨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돌아보다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아저씨 : 아가씨, 저 따라왔어요?
나 : 네, 길 몰라서 무작정 따라갔어요.
아저씨 : 아가씨는 어디서 왔어요? 등산 시작한 곳
나 : 의상봉에서 넘어왔습니다.
아저씨 : 의상봉에서? 보기와 다르게 체력이 좋으시네. 나는 문수봉에서 올라왔는데! 어디까지 가시게요?
나 : 비봉으로 가서 상명대 쪽으로 넘어갈 거 같아요
아저씨 : 나는 비봉에서 내려가는 길 찾아갈 거예요. 순수비 올라갈 거예요?
나 : 아뇨 오늘은 너무 미끄러워서 못 올라가겠어요.
아저씨 : 잘 생각했어요. 아니 근데, 날도 더운데 젊은 사람이 바다 안 가고 뭐 하러 산에 왔어요?
나 : 산이 좋아서요.
아저씨 : 그건 그렇긴 하지. 뭘 좀 아시네.
산이 좋다는 대답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답이다. 예전엔 산vs바다 중 고르라고 하면 주저 없이 바다를 골랐을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산에 물들었나 보다. 대화하다 보니 금방 비봉에 도착했다. 아저씨와 인사하고 갈 길을 가는데 주변에 있던 등산객들이 왜 일행이랑 안 가고 혼자 가냐고 물어봤다.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 말하고 마저 길을 떠났다. 하산길은 완만했지만 그간 내린 비 때문에 젖은 구간이 훨씬 많았다. 등산로를 따라 물이 대거 흐르는 바람에 얕은 계곡으로 착각할만한 구간도 있었다.
등산어플에 나오는 경로는 보통 다른 유저들이 운동하고 올린 루트이다. 보통은 등산로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으나, 하필 이날 내가 참고한 건 막판에 길을 잘못 잡은 유저의 경로였다. 길이 점점 이상하다 싶었지만 사람이 덜 다니거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길도 있으니 그냥 갔다. 계속 가다 보니 거미줄이 많고 풀이 우거지다가 길처럼 보이는 곳이 좁아지더니 뚝 끊겨버렸다. gps상으론 내가 있는 곳이 맞는데 길이 없으니 당황스러웠다. 좀 떨어진 곳에 도로가 보일 정도로 많이 내려온 상태였지만 바로 앞에는 풀이 많이 우거진, 오버 좀 보태서 야산의 땅이 있었다. 풀독, 뱀이 우려되었지만 다시 등산로를 찾아 올라가기엔 힘이 빠진 상태였다. 결국 고민 끝에 냅다 뛰어 내려가서 하산을 마칠 수 있었다. 사전조사를 제대로 안 하고 어플 경로만 믿고 갔다간 호되게 당할 수 있음을 몸소 겪은 날이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 5시간 넘는 산행을 하니 난생처음으로 ‘이러다 일사병 걸리는 거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물을 1.5리터 챙겨가서 중간중간 마셨는데도 화장실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고 갈증이 심했다. 평지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갔다. 드라마 ‘악귀’에서는 주인공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죽은 귀신에 빙의되었고, 편의점에서 생수를 미친 듯이 들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편의점에서 물을 구매하여 순식간에 한 병 비우고 나니 문득 그 장면이 생각났다. 그만큼 갈증으로 물이 간절했다. 이후론 물이랑 이온음료를 넉넉히 챙겨서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해줬다. 더위가 좀 가셨을 때 여름처럼 수분 보충을 하다가 고생한 적도 있는데 이 일화는 나중에 나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