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이면, 기왕 하는 김에

북한산 횡종주

by 푸른치타


기왕이면, 기왕 하는 김에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해야 한다. 가을 단풍 구경을 위해 북한산으로 향한 날이었다. 광청종주 성공 후 자신감이 붙어서 장거리 산행을 계획했다. 바로 북한산우이역에서 나와 영봉에서 시작, 족두리봉으로 하산하여 불광역에서 끝나는 북한산 횡종주! 광청종주 24km, 북한산 횡종주 17km로 거리는 북한산이 짧지만 경사와 코스의 난이도는 더 높다. 그래도 걱정은커녕 기대감뿐이었다. 등산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맞이한 가을 단풍 산행이기에 그저 들떠있었다.


북한산우이역은 이른 아침에도 등산객들로 북적였지만 영봉으로 향하는 길은 한적했다. 영봉으로 오르는 길이 북한산 탐방로 중엔 이용객이 적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고, 당시엔 몰랐기에 사람이 안 보이는 걸 의아하게 여기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딱히 위험해 보이는 게 없고 갈 길이 먼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올라가다 보니 금방 전망이 트였다. 24년 가을은 유난히 더워서인지 10월 말인데도 단풍은 겨우 절반만 진행되었으나, 완전하지 않다고 멋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영봉에 도착하니 나보다 일찍 올라가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 주변에 고양이 몇 마리가 알짱거리며 음식을 얻어먹으려는 모습은 귀엽기도, 안쓰럽기도 했다. 잠시 주변 경관을 보고 백운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고양이 소리가 계속 들렸다. 처음에는 영봉에 있는 고양이들 소리가 들린 줄 알았는데 영봉에서 좀 멀어졌는데도 고양이 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나를 따라 같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싶었는데 등산로 옆에 있는 풀숲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점점 가까워지더니 노란 고양이가 보였다. 우연히 동선이 겹친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고양이는 곧 나를 따라잡더니 등산로 앞에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 날 응시했다. 좁은 등산로에서 움직이지 않고 길을 가로막은 채로 한 번씩 야옹 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봤다.


멈춰서 고양이가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시 물 2병만 들고 갔을 뿐 음식은 전혀 없었고, 음식을 바라는 거라면 영봉에서 먹으며 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되는데 뭐 하러 굳이 멀리까지 날 쫓아왔는지 의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움직일까 싶어서 가던 길을 가려고 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니 비키기는커녕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좁은 외길이라서 내가 비켜갈 수도 없으니 난감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눈 맞춤을 하다가 천천히 깜빡이며 일명 ‘눈인사’를 몇 차례 시도했으나, 고양이는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영봉으로 돌아가려 뒤돌아 가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또다시 내 앞으로 불쑥 나와 길을 막았다. 날 경계하면서 내가 가는 길을 자꾸 막는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은 뛰어서 따돌리기. 심호흡을 하고 다시 뒤를 돌아 백운대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뒤에서 또 “야옹”하더니 고양이가 날 쫓아 같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내리막길이었으니 가능했지 올라가는 길이었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뛰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쪽에 도착하면 고양이가 따라오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 더 열심히 뛰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지만 날 가로막던 고양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는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고, 더는 뛸 필요가 없으니 원래 페이스를 되찾았다. 백운대로 향하는 길엔 인수암이 있는데 돌담에 두꺼비 돌조각과 황금빛 불상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절에서는 본 적 없는 모습이라서 그런지 자꾸 눈길이 가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는 횡종주 코스에 있지만 필수는 아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과 다른 코스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정상에 올라가더라도 다시 갈림길로 내려가야만 다른 코스로 갈 수 있기에 정상을 꼭 거칠 필요는 없다. 장거리 종주할 땐 오히려 체력 비축을 위해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이정표에 나온 대로라면 갈림길에서 백운대 정상까지 편도 0.5km. 다시 갈림길로 내려와야 하니 왕복하면 1km가 추가된다. 산행에서 1km는 짧은 거리가 아니고, 특히 경사 높고 험한 길은 체력 소모가 크다. 하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웠다. ‘기왕이면 여기까지 왔으니 백운대를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어 결국 오르기로 했다. 코스 초반이라 체력이 여유 있기에 호기롭게 나섰다. 철난간을 붙잡고 오르다 보니 사람들이 정상석에서 사진 찍기 위해 줄 서있는 곳이 보였다. 얼른 뒤에 서서 기다리며 가방에서 바람막이를 꺼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기다리는 동안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보호해야 했다.


백운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갔다. 만경대, 용암문을 거쳐 대동문까지 향하는 길엔 단풍이 꽤 보였다. 특히 성곽길 주변이 울긋불긋 예뻤다. 산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알록달록한 산의 모습을 보면서 힘을 냈다.




등산 어플에서는 계속 내가 간 곳이 어디라고 안내가 나왔지만 코스가 길어서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니 구분할 정신도 없었고 그저 코스를 따라가기 바빴다. 그렇게 가던 중, 드디어 낯익은 곳이 나왔다. 여름에 갔던 문수봉이었다. 처음 갔을 땐 내려가는 길이 막막했지만 1번이나마 가본 게 도움이 됐는지 그럭저럭 갈 수 있었다.




문수봉을 지나서 향한 곳은 비봉. 진흥왕 순수비가 있어서 유명하지만 올라가는 길이 위험하기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비봉 역시 백운대 정상처럼 굳이 봉우리 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기왕이면’ 정신이 문제였다. 백운대 갈 때와 달리 체력이 많이 빠진 상태여서 섣불리 올라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자니 나약함에 지는 기분이 들었고 결국 기왕 하는 김에 올라가기로 했다. 비봉 순수비 올라가는 길엔 일명 ‘코뿔소바위’가 있다. 여기도 소문난 포토존이라 사진 찍는 사람들이 좀 있길래 슬쩍 줄을 서서 내 모습을 남길 수 있었다.



비봉을 지나 향로봉에 도착했을 땐 많이 지친 상태였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으로 간신히 다리를 옮기는데 문제는 핸드폰 gps였다. 등산어플 경로를 따라 족두리봉 방향으로 가려는데 이상했다.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된 것 같아 방향을 바꿔도 자꾸 튀어서 이상하게 가는 것처럼 나왔다. 힘들어 죽겠는데 길을 못 찾고 왔다 갔다만 반복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 내게 부모님 연배로 보이는 아줌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간식을 나눠주겠다고 하기에 거절하고 족두리봉으로 가는 길을 여쭤보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셨다. 설명을 들으며 봐도 감이 오지 않았고,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족두리봉으로 내려가는 길이 생각보다 짧지 않은 것 같아서 심난했다. 내가 지친 걸 알아챘는지 아줌마는 옆에 앉아서 좀 쉬라고 하셨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걸 즐기지 않지만 다른 자리를 알아볼 여력도 없었기에 옆에 털썩 앉았다.


아줌마는 사과를 가져왔다며 깎아서 건네주셨는데, 거절하다가 결국 염치 불고하고 얻어먹었다. 간식을 안 챙겨 와서 드릴 게 없다고 죄송스러워했더니 “그건 상관없지만 비상식량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라고 하셨다.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한데 아가씨가 혼자 다니니 걱정되어서 일부러 말을 걸었다, 북한산처럼 사람이 많은 산도 인적 드문 곳은 위험하니 혼자 다니지 말아라, 복장을 보니 초보 같은데 그렇게 입으면 안 된다, 산에 다니면서 짐이 그렇게 없으면 되겠냐며 열심히 조언을 해주셨다. 진심으로 걱정해서 말씀하시는 게 느껴져서 기분 나쁘기는커녕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대화하다 보니 어느덧 1시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해가 저물기 전에 내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줌마께서는 “족두리봉은 이 시간에 사람이 많지 않고, 낙엽이 많이 떨어진 가을에 하산하기 적합하지 않다”며 다른 곳으로 함께 내려가자고 권했다. 기왕 갔는데 하필 족두리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기는 아까웠다. 그러나 내게 맞는 난이도를 고려하지 않고 내내 ‘기왕이면’을 고집하며 가다가 체력 조절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엔 고집을 접고 아줌마를 따라서 함께 하산했다.


하산길에 찍은 전경


상명대 근처로 하산하는 내내 등산 조언은 계속되었다. 낙엽이 많이 떨어지는 시기엔 길이 미끄럽고 낙엽 밑이 위험할 수 있어서 스틱을 가지고 다니는 게 좋다, 등산화가 중요하니 지금 신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걸로 사야 한다, 등산을 제대로 하려면 옷도 잘 갖춰야 한다, 체온 변화에 대비하여 겉옷은 덥기 전에 벗어야 하고 춥기 전에 입어줘야 한다 등등. 물론 조언만 있지는 않았다. 20대 시절에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등산할 때 겪은 일화, 부상으로 수술해서 한동안 쉬었던 것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있어서 흥미 있게 들었다.


아줌마는 하산을 완료하고 나서도 바로 헤어지지 않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하셨다. 왠지 사주시려는 느낌이라 거절했는데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고 하셔서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 밥 한 끼 먹이고 보내려 했는데 아쉽다며 커피를 사주시더라. 어쩌다 보니 내내 도움 받고, 얻어먹는 입장이라 민망해하니까 오히려 밥을 못 사준 게 미안하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호탕하게 말씀하셨다. 등산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며 가입한 카페를 소개해주고, 여기서 정보 얻으며 등산도 같이 하자고 하셔서 얼떨결에 번호 교환도 하고 카페 가입까지 마쳤다. 등산 장비 마련할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셔서 종로 5가로 넘어가 등산 브랜드 모여있는 곳, 등산장비 매장을 함께 둘러보기도 했다. 등산화 고르는 방법, 브랜드별 좋은 제품, 장비 사용법까지 속성으로 강의를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줌마와 대화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가 겹쳐 보이는 때가 몇 번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 말은 열심히 듣고 호응하면서, 정작 엄마가 이야기를 할 땐 귀찮게 여겼던 내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후 몇 차례 내가 먼저 연락하기도 하고, 아줌마께서 먼저 연락하기도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서로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같이 등산을 가지 못하니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여태 연락처를 지우지 않았고, 여전히 카페 회원이다. 언제까지 지우지 않고 카페 회원으로 남을지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연락이 다시 이어질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산을 좋아하니 언젠가 산에서 또 우연히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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