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요정이고 싶었던 날씨요괴

소백산 2차 도전

by 푸른치타


한라산으로 처음 설산을 접하고 제일 먼저 한 건 바로 아이젠, 스패츠 구매였다. 장비를 갖춘 기념으로 처음 향한 곳은 소백산. 가을에 갔을 때 비로 인해 곰탕이 되어 전망을 제대로 감상 못한 게 아쉬웠는데, 소백산으로 향하는 안내버스 스케줄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주말 이틀 모두 있었는데 토요일 15km 코스, 일요일 11km 코스로 조금 달랐다. 일요일은 가을에 다녀온 코스와 동일했고, 겨울 등산은 익숙하지 않으니 체력에 자신이 없어서 후자로 예약했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월요일부터 기상청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예보를 확인했다. 처음엔 일요일에 흐리다고 되어 있더니, 수요일부터는 눈+비로 바뀌었다. 불길함을 감지하고 예약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이미 수수료 무료 취소 기간은 지난 상태. 장기 예보는 변동될 가능성이 높으니 제발 날씨 운이 따라주기만 바라며 매일 기상청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등산 당일 일어나자마자 예보를 보니 서울은 새벽부터 눈, 소백산은 오후 3시부터 눈! 눈이 늦게 내리면 정상에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고, 예보가 안 맞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마인드를 가지고 출발했다.


출발지인 어의곡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이미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눈 맞으며 한라산을 등반한 기억이 뇌리를 스쳐서 체념한 상태로 '내가 원정 등산이랑 뭐가 안 맞는 걸까, 아니면 소백산이랑 기운이 안 맞는 걸까'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를수록 눈송이가 굵어지더니 점점 함박눈 수준으로 변했다. 바람이 거세서 일명 ‘똥바람’으로 유명한 소백산답게 눈+바람이 만나 휘몰아치니 소리가 장난 아니었다.


올라가는 길에 찍은 영상


상고대라도 있으면 그나마 덜 아쉬웠을 텐데 나무는 휑하고, 눈앞은 뿌옇기만 했다. 아쉬웠지만 어차피 바람이 차서 경치 감상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설산이 처음은 아니고, 가을에 한 차례 가봤던 길이라서 그런지 눈길이어도 오르는 건 수월했다.


날씨 때문에 위험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산보다 사람이 더 위험했다. 등산 다니다 보면 스틱을 부주의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이 날은 유독 많이 보여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아저씨가 멈춰 서더니 스틱을 든 채로 팔을 뒤로 휘둘렀다. 아저씨와 거리가 꽤 있는 상태였음에도 팔길이+스틱길이가 더해져서 얼굴을 맞을 뻔했다. 다행히 피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정상 다가올수록 운무가 짙어 주변 경관이 잘 보이지 않았고, 눈과 바람도 거세졌다. 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이런 날씨에도 정상에 도착하니 사람이 많았다. 정상석에서 인증샷 찍기 위해 20분 이상 기다려야 했는데, 의외로 기다리는 동안엔 바람이 거의 안 불어서 덜 추웠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요청해서 사진 찍고 하산코스인 천동 주차장 방향으로 향했다. 정상이 혼잡해서인지 정상에선 음식 먹는 사람이 없었는데, 좀 내려가니까 라면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라면냄새에 배가 고파서 챙겨 온 초콜릿을 먹으며 내려갔는데, 이것도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내다가 아이젠 케이스가 등산로 밖으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모르는 내리막 경사 위였으니 등산로를 함부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나마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한 발자국만 조심히 딛고 재빨리 주웠다. 안심하고 초콜릿 포장지를 까는데 이번엔 초콜릿을 떨어트렸다. 다행히 깨끗한 눈 위에 떨어져서 3초 안에 주워 후후 불어준 다음 쿨하게 먹었다.



내려가는 중에 눈이 잠시 그쳐서 좋아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랑 비를 다 맞은 상태로 하산을 마치니 오후 2시 반쯤이었고, 출발 시간까지는 2시간 남은 상태였다. 추워서 도저히 야외를 배회할 자신이 없었기에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등산복은 방수가 되니까 눈, 비에도 몸이 젖지 않았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는지 사장님이 날 보고 좀 놀라는 눈치였다. 커피를 팔아서 커피만 주문해도 되는지 여쭤보니 흔쾌히 가능하다고 하셔서 한 잔 주문했다. 사장님은 내 외투에서 흐르는 빗물을 보고 쫄딱 젖었다며 따뜻한 곳에 앉으라고 안내했고, 약초물도 주며 친절하게 신경 써주셨다. 등산 코스랑 시작 시간을 물어보시더니 체력이 좋다는 립서비스와 함께 엄지를 척하고 내밀어주기까지 했다.


몸을 녹이며 산에서 찍은 사진을 살피다가 내 사진을 보고 멈칫했다. 궂은 날씨에도 표정이 밝고, 몇몇 사진에선 환하게 웃고 있더라. 일부러 의식하고 찍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날엔 친구랑 만나 덕수궁 관람을 했는데, 그날 친구가 찍어준 사진 속 내 표정은 피곤한 기색이 만연해 보였다. 두 모습이 대비되어서 기분이 묘하고 한편으론 재밌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눈이 내렸지만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서 일찍 돌아올 수 있었다. 지인들과 연락하다가 뭐 했냐고 물어보길래 등산하며 찍은 사진을 보냈더니 다들 리스펙을 외쳤다. 친한 동생은 내 사진을 보고 설산에 관심이 생겼다고, 내년 한라산 등반 생각 중이라고 해서 더욱 뿌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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