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백록담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일들의 연속이었다. 하필 단풍이 절정인 시기에 발목 염증이 생겼다. 운동이랑 담쌓고 살다가 10km 러닝 주 1-3회, 등산 1-2주에 1번씩 다녔더니 체력대신 카드값만 늘었다. 병원에서는 처음엔 일주일이면 괜찮아질 거라 했으나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충격파 치료까지 받으며 1달 이상 운동을 쉬었다. 가을에 등산을 못하는 것도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한라산 등산이 무산될까 불안했다. 눈 쌓인 백록담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버킷리스트에 있을 만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3주 이상 쉬면서 치료를 받으니 호전되었고, 제주도로 향하기 전에 완쾌했다.
친구와 비행기, 숙소를 예약한 건 3개월 전. 올라가는 날에 눈이 없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날짜가 닥치니 눈이 너무 와서 문제였다. 당시엔 등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겨울 산행은 한라산 외에 고려하지 않았기에 등산용품이 별로 없었다. 밤에 렌트하는 곳을 찾아가 예약한 물품을 찾는데 사장님이 사용법을 설명해 주며 말을 걸었다. 전날 눈이랑 바람 때문에 전면 통제였다고, 다행히 밤부터 통제가 풀려서 내일은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친구는 본인이 날씨요정이라 한라산 갈 때마다 날씨가 좋았음을 어필했고, 우린 그저 통제가 풀렸음에 안심했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으로 향하는 탐방로는 둘이다. 코스가 조금 더 길고 완만한 성판악, 성판악보다 짧지만 경사 높은 구간이 있는 관음사. 둘 다 예약은 필수이며 입장 시간은 오전 5-8시, 오전 8-11시 30분 2가지 중 선택 가능하다. 우리는 5-8시로 예약했고 5시 되자마자 오를 예정이었다. 3시에 일어나도록 알람을 맞췄고, 일어나긴 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밤늦게까지 치킨 먹고 놀다가 늦게 잠든 덕분이었다. 한라산이고 뭐고 잠이나 잘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 잠시 미적거렸지만 꾸역꾸역 몸을 움직였다. 야식을 든든하게 먹은 덕분에 에너지 보충할 필요 없이 후다닥 옷을 차려입고 나섰다.
등산로 입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들어갈 기미가 없어서 나와 친구가 맨 처음으로 입장했다. 밤새 눈이 많이 내렸으니 주의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국립공원 직원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길을 나섰다. ‘남들은 연차 내고 쉬는데 나는 연차날 고생하러 가는구나’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그렇게 인생 첫 설산이자 첫새벽산행에 도전했다.
일출, 야간산행 경험이 없었기에 어두운 산이 낯설었다. 랜턴이 없어서 핸드폰 플래시에 의존하며 걸었다. 한라산을 관음사 코스로만 여러 번 가봤다던 친구는 익숙한 듯 빠르게 움직이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친구와 속도를 맞추려 애썼지만 안 그래도 초보에다가 한동안 운동을 쉬기까지 했으니 쉽지 않았다. 결국 페이스 조절을 위해 무리한 따라잡기를 포기한 채로 가는데 종종 뒤에서 아저씨들이 먼저 가겠다며 날 앞질렀다. 전날 친구가 “등산 고인물 아저씨들은 이길 수 없어. 우리가 평일 새벽 5시에, 최대한 빨리 간다고 한들 정상까지 선착순 10명 이내로 들기도 힘들 거야”라고 말했는데, 직접 보니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눈 위에 남은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종종 그 옆이나 위에 짐승 발자국처럼 보이는 작은 흔적이 같이 보여서 신기하기도 했다.
초반엔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 좋았지만, 점점 무릎까지 올 정도로 높아지자 움직이기 힘들었다. 난생처음으로 써본 등산스틱은 익숙하지 않아서 제대로 활용 못하니 애물단지로 전락했으며, 한 손은 플래시 때문에 계속 핸드폰을 앞으로 향하게 들고 있으니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점차 날이 밝아지며 시야가 트였을 땐, 어둠 속에서 벗어난 것보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하늘에 햇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흐렸다. 더 올라가니 눈까지 흩날리기 시작했다.
삼각봉 대피소에 다다르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한라산에 여러 번 갔어도 이 정도로 눈 쌓인 상태에선 처음이라고 했다. 설산 자체가 처음이었던 나는 비교대상이 없었기에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친구는 놀라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심지어 이 정도면 곧 통제되는 거 아니냐며 내려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탐방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라산 국립공원 사이트에 들어가 봤지만 모든 코스는 ‘정상 운영’이었다. 그걸 보고도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며 위험하지 않겠냐고 걱정했다. 설산 경험이 없으니 친구 말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정말 위험하면 통제하고 막을 텐데 정상 운영이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대피소는 해발고도 약 1,500m로 정상이 가까운데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짧은 고민을 마치고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원래 관음사 코스는 삼각봉부터 조망이 멋있기로 유명하지만 눈과 바람으로 인해 곰탕이었다. 친구는 조망이 안 보이는 게 아쉬운 눈치였으나 나는 다른 게 걱정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백록담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힘들 때마다 백록담 모습만 떠올리며 움직였는데 날씨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착할 땐 제발 괜찮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등산로 자체가 좁고, 옆은 바로 비탈길인 구간에선 주의가 필요했다. 눈이 너무 쌓인 나머지 밧줄을 친 높이보다 높은 상태였는데, 일부 구간은 허리까지 파묻힐 정도였다. 다행히 방수, 방풍이 되는 3L 재킷을 챙겨 입은 덕분에 상체는 전혀 젖지 않았다. 문제는 발이었다. 친구는 경남에 살다 보니 설산에 가는 일이 많지 않아 깜박해서, 나는 등산 장비를 잘 몰랐던 시기라서 둘 다 스패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눈이 등산화로 조금씩 들어오면서 조금씩 젖어가는 발 때문에 더 추웠다. 나중엔 녹은 눈이 신발 안에서 찰랑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라 발에 어항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주변이 트이고, 바람이 거세졌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오르고 올라도 또 오르는 길이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될 줄 알았건만 끝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한 번씩 일찍 올라갔던 사람들이 눈에 몸을 반쯤 파묻힌 채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일 때면 내려갈 걱정에 막막해졌다. 지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올라가던 중, 내려가던 아저씨가 내게 “아가씨, 이 날씨에 관음사 방향에서 올라온 거예요? 대단하네. 정상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힘내요.”라며 응원을 건넸다. 감사하다는 말을 간신히 하고 힘을 쥐어짜며 움직였는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백록담에 도착했다.
우려했던 대로 백록담은 정상석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록담이라는 글씨가 없었다면 백록담인지도 몰랐을 풍경이었다. 친구는 여태 한라산 가면서 사람이 이렇게 별로 없던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보통 정상석에서 사진 찍으려 1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경우도 많다는데 우리는 금방 찍을 수 있었다. 바람이 거세서 몸이 휘청거려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원하던 풍경은 아니었지만 고생 끝에 무사히 도착해서 뿌듯했다.
친구는 관음사 코스로 도저히 내려갈 자신이 없다며, 경사가 완만한 성판악 방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체력적으로도 지쳤고,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기에 동의하고 친구를 따라갔다.
관음사 코스로 올라갈 땐 발자국이 거의 없었는데, 성판악 코스는 올라온 사람이 많았는지 수많은 발자국이 보였다. 눈도 관음사만큼 쌓이지 않아서 움직이기 수월했다. 내려가다 보니 갑자기 하늘이 조금씩 맑아졌고,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을 땐 잠시 햇빛이 예쁘게 비췄다.
상고대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아름다웠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백록담에 있을 때 이런 하늘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백록담으로 가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서 올라갈 자신이 없었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하늘이 계속 맑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서 약간의 미련을 가진 채로 하산을 재촉했다.
이 날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길고 완만한 코스는 내게 안 맞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움직임이 편해서 좋았지만 가도 가도 길이 끝나지 않았다. 한참 내려갔는데 해발 1천 미터, 끝날 줄 알았는데 해발 800미터.. 지루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하산이 끝났을 땐 환호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었던 백록담은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지만, 힘든 상황에서도 무사히 완등해서 성취감이 컸다.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보고 지인들이 디엠으로 히말라야 간 거 아니냐고,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하는 걸 보니 쑥스러우면서 동시에 뿌듯했다. 이제 한라산은 다시 갈 일 없다고, 한 번이면 충분히 경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