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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빠 Jun 27. 2023

밴드 빨리 떼기? 천천히 떼기

어릴 적 작은 상처에도 나는 엄살이 심했다. 잘 아물라고 붙였던 반창고를 떼야 되는 순간에도 벌벌 떨었다. 나는 아버지가 밴드를 안 아프게 떼주시기를 원했다.  

“아빠, 살살 떼 줘.”

“응.”

“팍.”

“아파!”

“원래 반창고는 빨리 떼야 안 아픈 거야.”     

그렇게 나는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어느 날 셋찌 다리에 붙어있는 반창고를 보았다.  이제 떼도 될 거 같은데 오래도록 떼지 않고 있길래 말하였다.

“이리 와 떼줄게.”

“아빠는 아프게 떼서 싫어.”

“맞아, 아빠는 아프게 뗄 거야 오빠가 살살 떼 줄게.”

첫째가 맞장구를 치며 자기는 안 아프게 밴드를 제거해 주겠다며 동생을 꼬신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아프게 떼나 싶었다.

덩달아 어릴 적 내가 아빠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문득 아버지의 말씀을 너무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 깨달았다. 딱히 그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시 딸에게 말했다.

“이번엔 진짜 안 아프게  떼 줄게.”

“정말?”     

사실 확 떼 버리고 싶었지만, 살살 떼 질 수도 있으니 다시 말하였다.

“어. 정말 살살 떼줄게.”

“진짜 살살해줘야 돼.”

조심스레 다가와서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조심스레 밴드를 떼었다. 다행히 셋찌가 씻고 나온 터라 밴드가 이미 물에 많이 불어 있었고 접착력이 약해져서 쉽게 벗겨졌다.  

“거봐 아빠도 살살할 수 있지?”

“그러네.”

엄살이 심한 셋찌가 그렇게 갔다.


     

다시 이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확 떼서 한꺼번에 고통을 겪는 것이 나은 것인가?  

살살 떼서 고통을 분산시키는 것이 나은 것인가?


이것을 삶의 고통에 대입시켜 보면 어떨까?

한 번에 강한 고통.

아니면 여러 번의 나누어진 고통.


과연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더 좋을까. 대부분 사람의 삶의 고통의 총량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나누는 것이 나을까, 아님 한 번에 몰아치는 것이 나을 것인가.

사실 별 의미 없는 고민 같다.  인생이 그 고통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 말이다. 그래 그냥 닥치는 대로 겪는 것이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고통이라야.

우리 아이의 밴드를 강하게 뗄지 약하게 뗄지와 내 몸에 붙은 밴드를 뗄 때 말고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정도라도 선택할 수 있는 게 다행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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