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지난 트럼프 당선 이후 민주주의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뉴욕 타임스>에 기고했던 칼럼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를 계기로 출판한 책이다. 두 교수는 현대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 다양한 국가의 사례와 예시를 분석하여 그것이 트럼프의 미국에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이 출판된 시점이 트럼프 초기라는 점이다. 미국 역사에 유례없는 사건으로 기록된 2021년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사건이나 코로나 팬데믹 시절의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을 탄핵시켰던 가장 최근의 사건이었던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트럼프 초기에 쓰인 이 책은 이후 트럼프 정부가 보인 반민주주의적인 행태에 대해 예측하고 있으며,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와 시기를 넘어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2025년의 대한민국의 현실이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참고로 이 책은 2018년 한국에 발간된 이후 절판되었다가 최근 재출판되었다.
우선 이 책의 서문을 좀 소개하고 싶은데, 현재 시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 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중략)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전복 시도는 의회나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다. 심지어 사법부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혹은 선거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개선’하려고까지 한다. 신문은 똑같이 발행되지만, 정권의 회유나 협박은 자체 검열을 강요한다. 시민들은 정부를 비판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세무조사를 받거나 소송당하게 된다. (중략)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 (중략) 이러한 경우 쿠데타나 계엄령 선포, 혹은 헌정 질서의 중단처럼 독재의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은 울리지 않는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사람들 대부분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 책은 다양한 독재 사례를 분석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하는 데 비슷한 전략을 모두 사용했다는 점을 밝혀낸다. 이 전략 패턴을 알면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더욱 분명하게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최초의 대통령제를 만들어냈던 미국을 예시로 어떻게 파시스트나 반민주주의자들이 정치권에 들어오지 못했는지 소개한다. 미국의 역사에 극단주의 선동가가 정치권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인물이 없었거나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정치라고 하는 제도 안에서 걸러낼 수 있는 관문이 있기 때문인데, 저자들은 그 역할을 정당이 맡는다면서 문지기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것은 트럼프의 당선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트럼프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정치권 내의 시스템에서 탄생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공화당의 후보로 뽑히고 대통령 선거에도 나가게 된다. 그 과정을 책에서는 잘 설명하고 있는데, 트럼프뿐 아니라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등 민주주의에 해악이 되었던 다수의 정치 사례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런 정치 세력들이 어떻게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전복시켰는가를 정리 요약한다. 1992년의 후지모리 대통령처럼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무효화하는 극단적 독재자도 있었지만, 정부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하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저널리스트들을 테러리즘 선전에 동원된다는 식으로 여론몰이 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알아차리기 힘들게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데, 대표적인 것이 심판 매수다. 법원과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규제 기관 등 사회에서 심판 역할을 하는 기관들을 매수하는 것이다.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해 정적을 처단하고 자신의 동지는 보호하며, 세무 기관을 앞세워 야당 인사와 기업인, 언론인을 공격한다. 그리고 경찰은 야당 지지자의 시위는 탄압하는 대신 친정부 인사의 폭력은 묵과한다. 그리고 주요 언론사가 세무 조사 및 수사를 받게 되면 다른 언론사들은 자세를 낮추고 검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운동장을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선출된 독재자는 국가 위기를 이용한다고 분석한다. 책에서는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나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118p)라고 적는다. 이 과정에서 어떤 독재자는 스스로 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필리핀 전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 선포 당시 위기를 조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2018년에 발간된 책에서 두 명의 정치학과 교수가 서술한 것이다. 1기 트럼프 초기였으며, 한국에는 윤석열이 당선되기도 전이었다. 그럼에도 저 내용에서 한국의 사례와 유사점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유사점이 아니라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시도되었던 다양한 편법들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사례를 남겨 하나의 정립된 틀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즉, 현대 민주주의하에서 합법적 민주주의 붕괴 과정은 대체로 동일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후 책은 트럼프의 반민주주의적인 행위에 주목한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사법, 입법, 행정의 삼권분립으로 독재를 막는다. 반대로 한쪽의 힘을 비대하게 키우거나 세 개의 권력을 전부 움직이면 독재를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존의 정치는 오랜 기간 그들 안에서의 관행 같은 것을 만들어왔다. 예를 들면 당선이 되고 나면 국가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통치를 이끌고, 당선이 되지 않은 측은 상대 후보를 존중하는 ‘상호 관용’이 있다. 문제가 많았던 부시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 대담을 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치열한 논쟁을 기대했지만 두 전임 대통령이 서로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두 사람이 보였던 태도는 이 상호 관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트럼프는 전통적 문법을 파괴한 경우다. 오바마 정부 당시 오바마의 출생에 의문을 던지며 미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선동가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가짜뉴스를 확산하며 정치적 상대를 공격해 왔다. 또한 삼권분립으로 구성된 법치주의에는 빈틈이 존재하는데, 그 빈틈을 적극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했다. 예를 들면 입법기관인 국회를 통해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시행령과 행정명령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법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독재자의 권력 강화 전략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편 주전이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막고, 경기 규칙을 고쳐서 상대편에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이는 방식이다. 이후 책은 구체적 사례를 통해 독재화 혹은 반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 트럼프 정부를 견제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과 전략을 공유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 목적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트럼프의 당선은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에게는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 있는 끔찍한 신호로 보였겠지만, 반대로 정계 진출을 꿈꾸는 정치업자들에게는 아주 이례적이고 흥미로운 사례로 보였을 것이다. 최초로 대통령제를 시행했던 민주주의 국가,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에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발언과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기존 정치권의 밖에 있던 인물이었다. 새로 정치권력을 손에 넣고 싶은 자들에게는 벤치마킹하고 싶은 성공 사례인 것이다.
나는 윤석열 또한 그런 사례라고 생각한다.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삼권분립을 무시한 행위를 반복해 왔다. 대통령 경호처에서 군과 경찰을 지휘할 수 있도록 멋대로 시행령을 만들거나, 국회와의 협의 없이 독단으로 극우 인사와 뉴라이트 인사들을 국가 요직에 임명한 것은 책에 등장한 사례에 부합한다. 그의 본모습은 후보자 시절부터 드러났다.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자였을 때 가족 관련 질문을 하는 언론에 지지자들이 좌파라며 회피하도록 하는 모습이 뉴스 영상에 남아있는데, 이 지지자들은 부정선거를 밝혀내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이는 지난 12.3 내란 당시 윤석열의 인식과 유사하다. (참고로 이 영상은 ‘"좌파 질문받지 마" 윤석열도 난감한 극성 지지자들’이라는 제목으로 JTBC에 올라가 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당선이 되었을까?
언론들의 교묘한 가리기나 일방적인 감싸기를 언급하기 전에 지난 대선 당시 목격했던 신기한 광경을 언급하고 싶다. 당시 윤석열에 투표했던 사람들은 이상한 정의감과 분노에 불타 있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남성에게 불평등하다며, 혹은 여성에게 불평등하다며, 또는 집값이 너무 올라서 자신의 미래가 막막하다는 이유로 당시 여당의 반대편에 투표했다. 현재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이유였지만, 그래서 자신들이 투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보려 하지 않았다.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감정에 지배되면 이성이 힘을 잃는다.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자신의 부모 세대 (혹은 윗세대) 만큼 잘 살지 못하는 젊은 세대가 현실에 불만을 갖고 현 정권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 결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우파들이 득세를 하게 되었다. 우파를 지지한다기보다는 현재의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사람들의 분노를 조장했던 것이 온라인상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갈라치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는 부동산 문제라고 불리는 집값 상승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집값이 하락했다면 과연 그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겠느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집값이 오르면 오르는 대로, 내려가면 내려간 대로 딴죽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집값이 이렇게 계속 떨어지는데 내 집 마련이 꿈인 젊은이들 어떡하나, 암울해진 장밋빛 미래’라며 집값 하락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겠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결과로 벌어진 현상이다. 초창기부터 여러 문제를 보이자 윤석열에 투표했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책망이 돌아올까 봐 외면했고, 반대편에 투표했던 사람들은 답답함에 분노하다가 피로감을 느꼈다. 그 결과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가중되었다. 12.3 계엄으로 확실한 경종이 울려서 그렇지, 이전까지는 사람들의 정치 거리두기 현상은 지속되었다. 레거시 미디어라고 불리는 기존 언론이 현실을 왜곡했어도 흔히 대안 언론이라고 불리는 유튜브 저널리즘은 살아있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부의 행적에 대해서도, 문제가 다분한 극우 인사 등용도, 그리고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예측되었던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도 언급되었지만 제대로 공유되지 않은 것은 시민들의 피로감 혹은 무관심이 가장 큰 원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은 책에 소개된 페루,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필리핀 등과 함께 21세기에 유례없는 사례로 계속 소개될 텐데, 전 세계를 경악시킨 이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초창기부터, 후보자 시절부터 계속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주권을 가진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숨어버렸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나머지 한 가지, 국민의 무관심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현대 민주 사회에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있다. 바로 관심이다. 내가 돌아가는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피곤하지만 이것이 내가 관공서에서 권리를 주장하고, 투표권을 행사하게 하는 대가다. 개인의 운명은 국가의 운명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내가 똑같은 일상을 계속 살아가려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공동체가, 국가가 무너지면 그 일상은 단절되고 만다. 내가 똑같은 월급을 받아도 국가의 환율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가난해지고, 아무리 유명한 인물이 되어도 국가의 위상이 무너지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제처럼 열심히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해도,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망가지면 생존하기 힘들어진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국가를 위한다느니, 민주주의를 지킨다느니 하는 이유가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소속된 집단이 온전해야 한다. 그 안에서 주권자로서, 그리고 나의 안전을 위해 끊임없이 치러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다.
내란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피로감은 쌓이겠지만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시계를 다시 거꾸로 돌려놓고 말 것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다시 일어설 것인가. 그 기로에 서 있다. 당신이 앞으로 살게 될 세상은 180도 바뀔 수 있다.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지속적인 관심이다. 당신이 목격한 현실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