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 봉준호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이라는 SF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리뷰를 한 적 있는데, 재능 없는 작가의 빈곤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평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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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본 설정은 영화와 동일하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한 시대에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는 한 무리가 있고, 그 안에 목숨을 걸고 위험한 임무에 나서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이 있다. 지구에서 빚을 지고 도주한 미키는 우주로 나가기 위해 이 익스펜더블에 신청하는데, 익스펜더블은 죽게 될 경우 데이터화한 자신의 기억과 3D 프린터로 만들어낸 육체를 통해 재생된다. 몇 번이고 죽었다 살아났다는 반복할 수 있기에 우주라는 위험한 공간과 새로운 개척지에서 선두에 나서게 된다. 그러다 사망한 줄 알았던 미키가 살아 돌아오면서 새로 만들어진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일이 <미키7>이자 봉준호 감독의 신작의 기본 줄거리다.
작품은 미국식 유머를 바탕으로 유쾌하게 진행된다. 원작 소설이 보여준 SF 설정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사실 여기서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영화 초반, 스티브 연이 연기한 티모가 ‘죽는 것은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는다. 마치 복제 인간의 재탄생이 내가 죽었다 부활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나의 기억을 데이터로 저장해 두고 새로 몸을 만들어 이식시킨다면, 그것은 나라고 볼 수 있을까? 영화에서처럼 죽었다 살아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작품에서 기억이 일부 업데이트되지 않자 전혀 다른 성격의 미키가 만들어지는데, 기억은 사람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가? 익스펜더블은 사실상 인간 복제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설정 때문에 실험실의 쥐 취급을 받는다. 복제한 인간은 인간인가? 복제인간에게 인권을 적용할 수 있을까? 거기다 새로운 개척지에서 인간이 보이는 행태는 미국 역사의 반복처럼 보이기도 하며, 별다른 재주가 없는 미키가 죽는 것이 일인 엑스펜더블이란 직업을 택한 것을 통해 노동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많은 이야기의 설정에서 짚어나갈 수 있는 가지가 많지만, 원작 작가인 에드워드 애슈턴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기본 설정을 가져갔을 뿐, 그것을 심화시키지는 않는다. 거기서 더 한 발 나아간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물론 모든 작품이 철학적 담론이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없이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다만 그런 경우 흥미로운 이야기의 진행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이 이 많은 설정과 배경을 깔아 둔 뒤에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는 미키7과 미키8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좁은 우주 기지 안을 떠돌거나, 애인과의 섹스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것이 전부다. 즉, ‘나’와 동일한 ‘나’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로 좁은 기지 안의 숨바꼭질과 섹스 문제로만 끝낸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봉준호 감독이 설마 이 작품을 그대로 가져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늘 흥미로운 이야기 너머에 사회에 관한 이슈를 건드렸던 감독인 만큼 진일보한 무언가가 나오리라 기대했다.
봉준호의 <미키17>은 원작의 연장선에 있다. 미키7이 17이 되기 위해 10만큼 더해진 것처럼 기존의 이야기에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캐릭터 각색과 결말이 덧붙여졌다. 문제는 원작의 흐름을 그대로 살렸다는 것이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은 중후반부까지 지루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 그래도 재미없는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데다가, 설정과 배경 설명에 할애된 분량이 많았던 탓이다. 영화 제작에 원작과 관련한 조항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처참한 SF 작품을 그대로 가져가다 보니 설정의 흥미로움 이상으로 뭔가 더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새로운 익스펜더블이 만들어질 때 사람의 몸이 프린터기의 용지가 뽑히는 것처럼 나오는 모습이나, 총을 쏘려다 제압당한 미키18의 손목을 뒤늦게 지그시 밟는 카이의 동작처럼 봉테일이라고 불리는 봉준호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주인공의 젖은 옷을 드라이기로 말려주는 장면에서는 서구의 배우들을 데려다 놓았지만 한국적 정서가 엿보이기도 한다.
거기다 헐크로 알려진 마크 버팔로의 새로운 연기나, 전혀 다른 두 캐릭터를 연기했던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력도 대단하다. 특히 마크 버팔로가 맡은 케네스 마샬이란 인물은 원작보다 매력적으로 각색한 경우다. 솔직히 마크 버팔로가 양성애적이면서 나르시스트적인 소시오패스 캐릭터를 이렇게 잘 연기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의 연기와 디테일한 연출이 돋보이다 보니 이 작품은 영화 제작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것 같다. 저기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저 배우 연기 끝내준다, 저 장면을 저렇게 살렸다니, 하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큰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 영화를 관람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만족스러울 때 작품에 덧붙여진 섬세한 부분들을 눈여겨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키17>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썩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대중적 흥행이란 측면에서 그렇다. <기생충>의 성과가 어마했던 만큼 유독 주목을 받은 차기작이었기에 괴리감이 좀 더 큰데, 그 주된 원인은 실망스러운 원작의 줄기를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분명 봉준호 감독도 원작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의 줄기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인간 복제에 관한 설정을 더욱 파고들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나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 미키17과 미키18을 오가다가, 미키 반스라고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장면은 더욱 빛을 발했을 것이다. 혹은 이야기 설정 부분을 줄이고 미키17과 미키18이 공존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에 더욱 집중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영화는 후반부, 미키 17과 미키 18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갑자기 집중도가 높아진다. 이는 원작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내용으로 영화에 새로 덧붙여진 것이다. 원작을 벗어나자 영화가 흥미로워졌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애초에 이 영화는 엉망이었던 원작 소설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존중 때문인지, 아니면 계약 조건 때문인지 봉준호 감독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갔다. 대신 원래 이야기의 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낸 느낌이다. 세세한 부분에서 각색을 하거나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준 것도 그렇지만, 마크 버팔로가 연기한 케네스 마샬이란 인물은 현실 정치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도 눈에 띈다. 봉준호 감독은 만들고 보니 트럼프와 유사해 보였다고 밝혔는데, 토니 콜렛이 연기한 그의 아내, 일파 마샬과의 케미를 보면서 윤석열과 김건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한국 관객들에게 현실 정치를 빗댄 장면이 너무 많이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그 피로도를 넘어설 만큼 새로운 임팩트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 점 때문에 영화를 높이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쉽다. 우리가 봉준호를 좋아하는 이유는 흥미로운 서사를 바탕으로 사회의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작에 갇힌 이번 작품에서는 그걸 잘 해내지 못한 느낌이다. 아예 이야기를 새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봉준호 감독이 해외 자본으로 해외에서 제작한 영화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평이 있던데, <미키17>도 그 사례로 인용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다행히 <옥자>보다는 나았으니 최악은 피한 걸까. (개인적으로는 <옥자>를 봉준호 감독 최악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설국열차>보다 뛰어나진 않은 것 같다. 다음에는 꼭 감독이 직접 써 내려간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