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 모니카 마론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여러모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풀어놓는 강렬한 사랑이라는 점, 그 사랑이 불륜이라는 점, 가끔은 이것이 사랑의 선을 넘어 집착이나 광기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확실한 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폭풍우 같은 사랑의 감정을 밀도 높은 문장 안에 잘 녹여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단순한 열정>에는 사랑에 빠진 상대가 잘 보이지 않지만, <슬픈 짐승>에는 그 상대가 선명히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정>은 저자가 독자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쏟아내는 하소연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 에르노의 글에는 내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졌고, 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으며, 사랑에 빠졌던 순간, 사랑이 흔들렸던 순간, 그래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 힘들어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마치 혼자 열병에 취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사람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글을 읽을 때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픈 짐승>은 그 반대 지점에 있다. 모니카 마론의 글에는 이야기가 있고, 인물이 있다. 그리고 자기 앞의 독자를 보며 꼬박꼬박 전달한다. 나와 그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은,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시작되었다.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백 살이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다. 어쩌면 이제 겨우 아흔 살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소설의 도입이다. 이 작품은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자신이 사랑했던 프란츠라는 남자와의 이야기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그녀의 기억력은 흐릿해진 상태이며, 사랑에 빠졌을 당시 그녀와 프란츠 모두 기혼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떠나보냈지만, 프란츠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프란츠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를 떠났을 때 그는 안경을 잊고 내 집에 두고 갔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안경을 썼다. 건강하던 내 눈을 그의 근시와 뒤섞어 흐릿한 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 점점 뜸해지고는 있지만 나는 가끔씩 안경을 써본다. 내 연인이 그 안경을 썼을 때 무엇을 느꼈을지 느껴보기 위해서다.
꼭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해야만 이 소설에 빠져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문장, 모니카 마론의 이야기 방법에는 빠져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소설은 빛이 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의 방식일지라도 그녀의 표현법을 수긍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한다면, <슬픈 짐승>은 강렬하게 와닿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잠깐 동안, 영국식 0.5파운드나 1파운드어치만큼 말이 없었다. 그리고 프란츠가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언제’라고 물었고 그는 ‘며칠 있다가’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뉴캐슬이라는 단어 뒤로 사라졌다.
우리는 지친 귀향자들처럼 탁자 주위에 앉아 각자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자신의 나이를 탐색했다. (…) 그녀는 반년 전 남편이 그녀를 버리고 떠난 후 몸무게가 30파운드 줄었고 그래서 아직도 몸무게가 85파운드밖에 나가지 않으니 이 맛있는 수프를 반드시 2인분은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을 위해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과 떠나보내지 않은 사람의 관계가 균등할 리는 없다. 이 불균형 속에서 그녀는 사랑에 아파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주인공은 자신이 한때 뇌 속에 흐르던 전류가 차단되어 실신 상태에 빠진 적 있다고 말한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털어놓는 것이다 보니 이야기는 때로 삐걱거리고 왜곡된다. 그녀는 그 점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그 솔직한 감정 표현, 그녀의 감정이 강렬해서 때로는 사랑이 아닌 위험한 무엇이 되는 것 같은 위태로움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책의 제목이 슬픈 ‘사람’이 아니라 ‘짐승’인 이유이다.
이 소설은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휘어잡았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겠지만,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특히 마음에 드는 문장과 표현이 많았고, 그래서 짧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표시를 해둔 페이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결국 이야기는 프란츠와의 관계가 정리되는 마지막을 향해 간다. 이 과정은 고조되는 방식이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 이 소설의 진짜 결말에서는 평이 엇갈릴 것 같다.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갑작스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결말에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상세한 내용을 적진 않겠지만, 다른 선택을 취했더라면 소설의 흐름이 가져다준 감정의 파도를 그대로 타고 갔을 것 같다. 하지만 작가가 결정한 결말로 인해 한 편의 작품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는 된다. 그로 인해 더더욱 이 소설의 제목이 <슬픈 짐승>에 가까워졌고, 앞서 안개처럼 깔려있던 복선들이 선명해졌으니까. 그러나 다르게 마무리되었더라면, 그래서 소설의 흐름이 깨지지 않았더라면 책이 초반부터 형성해 왔던 그 공기가 아름답게 결정을 맺으며 또 다른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이 소설을 읽은 당신은 이야기의 마지막을 사랑할 수 있을까.
<슬픈 짐승>은 사랑의 강렬한 표현을 사랑하는 사람, 모니카 마론의 문장을 흡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분량이 길지 않고 많은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니 이렇게밖에 전달할 수 없는 게 아쉽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문장에 끌렸다면, 아니 에르노와 유사한 계열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결말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작품을 만나게 될 것이다.